(1)좌우익 혼돈의 시대
정부 수립 이전에는 좌우익 사상이 혼재하고 있었다. 맨 먼저 좌익 쪽에서 온갖 감언이설로 마을 사람들에게 손짓을 해 왔다. 혼돈의 시대에서 방황하는 그 당시 마을 주민들, 과연 어느 편이 우군이고 어느 편이 적군인지를 분간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우리는 살아야 했다.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좌익 세력들이 차츰 지하로 스며들면서 그들의 아지트를 깊은 산 속으로 옮겨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공비들이 나타나 회합을 한답시고 주민 모두를 마을 공터로 불러냈다. 그들은 빨치산 혁명전선 구축을 위해 식량을 요구했고 무조건적인 협조를 강요했다. 또 청년 네 명을 앞으로 불러내고 식량을 지고 갈 것을 명령했다. 그때 붙잡혀간 청년들은 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없다.
이들의 활동이 차츰 흉포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은 자위적인 조치뿐만이 아닌 경찰의 지시에 따라 자체적인 청년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비들의 출몰을 경찰에게 알리는 단순 신고 업무만 부여받았으나 차츰 자체 방어 임무까지 떠맡게 되었다. 나중에는 무기까지 지급받게 되어 위기감이 점점 가중되고 있었다. 참으로 불안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청년단에서는 마을 어귀에 참호를 설치했다. 매일 저녁 2인 1조로 경비 근무를 하고, 공비가 출몰하면 20리길을 도보로 경찰서에 신고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서에 불려가 초죽음을 당한다. 무소불위의 경찰 권력은 서슬이 퍼렇게 날이 섰다. 인권이란 아예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불안한 세월을 언제까지 살아가야 하는가? 머릿속은 까맣게 멍이 들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세월이 한스러울 뿐이다. 평화의 등불을 언제쯤이면 훤히 밝혀줄까?
(2)공비 생포 작전
우리 마을에는 고정적으로 출몰하는 세 명의 공비가 있었다. 자기들만의 밥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들이 계속 식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서에 신고해야 할 것인가가 고민이다. 신고를 하자니 보복이 두렵고, 그냥 덮어 두자니 마을의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다. 만약에 이 사실을 경찰에서 알게라도 되는 날이면 또 한 번 큰 수난을 겪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심사숙고를 거듭했다. 이들 세 명만 없으면 적어도 우리 마을은 당분간 평화가 올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청년단의 비상회의가 소집되고 이들 세 명 모두 생포해 버리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드디어 세밀한 작전계획이 수립됐다.
며칠 전 이들에게 식량을 인도해 주도록 미리 약정이 되어 있었다. 이날을 D-day로 정하고 작전 수행을 위한 준비 작업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뒤 "저놈 잡아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온 마을은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 중 두 명은 방안에서 마을 간부들과 회담을 하고, 나머지 한 명은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방안에 있던 간부 중 몇 사람이 작전신호와 동시에 미리 숨겨둔 몽둥이로 갑자기 이들의 어깨를 내리쳤다. "억"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한 명은 즉석에서 쓰러졌고 나머지 두 명은 고함을 지르며 잽싸게 튀었다. 만약 저놈들을 놓쳐 버리면 우리 마을은 다 죽고 만다. 이들을 꼭 잡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단원들의 뇌리를 자극했다. 주변 담 밑에 숨어서 기다리던 청년단원들,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따라가 전원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참으로 긴 시간들이 흘렀다.
생포한 공비들을 경찰서로 인계해야만 한다. 20리길을 도보로 호송한다는 것, 생포 작전과도 맞먹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드디어 모험적인 호송작전도 완전히 종료됐다. 우리는 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야만 했었다. 마을의 안전을 위해서 경찰과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은 했지만 마음을 놓기에는 그 당시 시대 상황이 허락해 줄까?
(3)국군의 주둔과 여순 반란군
요란한 총소리에 잠을 깬 시각은 새벽 4시경으로 기억된다. "속골 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공비와의 교전이 크게 벌어진 것 같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속골'이란 국도가 통과하는 긴 계곡의 이름이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에야 총소리가 멎었다. 이튿날 늦은 시각에 공비가 아닌 여수 순천 반란군이란 소식을 들었다. 정보가 새어나간 것이 분명하다. 공비 토벌을 위해 대대급 국군 부대가 군 소재지에 주둔하기 위해 야간 이동을 하고 있었다. 반란군은 계곡 양쪽에 매복하고 부대 이동 차량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다. 군 트럭 20여 대가 국군을 가득 태우고 '속골'을 통과하고 있었다. 선도차가 계곡을 빠져나갈 무렵 반란군의 총격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려 자동차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모두 산 쪽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지만 깜깜한 밤인지라 반란군의 집중사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고함소리와 신음소리가 아비규환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결국 주둔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내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얼마 후 반란군이 의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다. 상가는 모조리 털리고, 반항하는 자는 즉석에서 사살되기도 했다. 또 무고한 시민들이 죽고 다쳐도 어디에도 항의할 곳이 없는 과도기적인 시대 상황이다. 그 후 며칠 동안은 그들 세상이 되었다. 전투경찰과 국군의 합동작전으로 치열한 시가전 끝에 반란군을 몰아냈다.
어느 날 삼촌이 신문을 보았는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집에 들어오셨다. 우리 동네에 무장공비가 들어와 동내 전체를 불사르고 동민 열네 명이 사살됐다는 정보라며 확인 중이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내일 당장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알고 보니 우리 마을이 아니고 약수터가 있는 인근 '월외'마을이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4)마을 청년의 죽음
공비들에게 끌려간 마을 청년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틈타 몰래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공비토벌작전이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선 살고 보자는 일념으로 집에는 왔지만 자수할 용기가 없었다. 새댁은 겁에 질려 며칠 동안 사랑하는 남편을 곳간에 숨겨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쉬쉬하는 사이에 그만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먼저 청년단에 알리고, 자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매일 저녁 순번제로 경비근무를 하고 있던 청년단에서도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날 근무한 경비 조와 청년단 간부들이 모조리 마을 공터로 끌려나왔다. "사람 살려"라는 비명소리와 함께 무고한 청년 단원들이 초죽음을 당했다. 혼수상태인 채로 집으로 모셔진 아버님을 보고 온 가족이 모두 울었다. 나는 그날 현장에서 직접 목격을 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비틀면 허리, 다리, 얼굴, 가리지 않고 마구 몽둥이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던 비보가 우리 마을에 날아들었다. 얼마 전에 공비로 잡혀갔던 마을 청년의 신병이 경찰서로부터 이곳 주둔군 부대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이다. 주둔군이 입성하던 날 반란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뒤라, 빨갱이라면 그들은 이를 갈았다. 왜 공비가 되었는지? 왜 자수를 하지 않았는지가 중요치 않다. 공비, 이름만 들어도 살기가 돋는다. 도망가라고 풀어주고는 집중사격으로 사살시키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 감히 누가 항의하겠는가? 자칫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때문이다.
왜 그 사람, 신혼의 달콤한 꿈도 잃어버린 채 이름도 없이 그렇게 죽어가야만 했는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쌍한 영혼, 방황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깔려 죽은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으리라. 결국 이렇게 비운의 생을 마쳐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면 차라리 이 세상에 오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5)끈질긴 생명력
17세의 어린 나이에 공비에 끌려갔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기적과도 같은 끈질긴 한 생명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비들에게 붙잡혀 가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없었다. 그는 공비로 줄곧 산 생활을 하면서 2년여의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아남았다. 그는 계속되는 공비 토벌 작전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왔다.
때로는 배고픔을 풀뿌리로 연명했고, 살을 에는 혹한을 견뎌 내야 하는 고통을 씹으며 살아남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우리 지역 마지막 토벌 작전으로 기억된다. 공비 전원이 사살되는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단 한 사람, 그가 생포되었다. 나이가 어린 덕분인지 몇 개월 후에 무사히 풀려났다.
곧바로 6'25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마을 동료 8명과 함께 예외 없이 국군에 소집되었다. 일주일간의 약식훈련을 마치고 중부전선 최일선 소총소대에 배속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투, 백병전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압록강의 물을 마시느냐가 최대 목표이다. 우리 군의 모든 부대는 시샘을 하듯 압록강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다.
중국이 그냥 보고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때 바로 중공군 대부대가 물밀 듯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압록강을 바로 눈앞에 두고 1'4후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총지휘한 맥아더 장군은 국경을 넘어 만주까지 폭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3차 대전을 염려한 미국이 맥아더를 본국으로 소환해 버렸다. 어쩌면 맥아더의 주장대로 했더라면 남북통일이 빨리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평북 희천에서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뒤처진 전우를 만나 묘향산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사일생으로 원대복귀는 했지만 복귀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잠시 총소리가 잠잠해졌다. 밤의 적막을 깨고 중공군의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면 영락없이 포위되었다는 신호다. 다음 집결지 철원까지 개별적으로 흩어져서 포위망을 뚫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철원까지 내려오는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원대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함께 입대했던 마을 청년 대부분은 전사했지만 이 사람만은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인가? 이 사람을 두고 불사조란 용어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6)6'25전쟁이 터지다
갑자기 전 주민 동원령이 내려졌다. 동원된 주민들은 초등학교 교정에서 인원 점검을 마치고 그날 밤중으로 40리 길을 걸어서 방위선 구축 작업에 모두 투입됐다. 또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던 방위군과 전투 경찰대 한 무리가 우리 마을에서 며칠을 쉬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쪽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마을 앞 개울 건너 포플러 숲에는 미군 포부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밤낮 가리지 않고 대포를 쏘아 댄다. 대포 소리는 온 천지를 진동하듯 지축을 뒤흔들었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뒤엎어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온 마을을 엄습해 왔다.
어느 날 아침이다. 등교하려는 순간에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학교로 달려갔다. 인민군 정찰대 1개 분대와 매복 중인 전투경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10여 명 중 5명만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을 뿐 나머지는 다 탈출하고 말았다.
그때 죽은 인민군 정찰병들은 모두 앳된 소년병들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길섶 산자락에 모두 매장되었다. 잡초와 칡넝쿨로 덮여 있는 이름 모를 비목으로 남아 있었는데 6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지 못하고 지금은 비목마저 썩어 없어져 버렸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별다른 징후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이다. 앞산으로부터 수백 명의 노란 군인들이 개미떼처럼 줄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부터 공산당 세상이 되고 마는가?
(7)인민군 보국대
'안강'(安康) 전투 현장으로 보낼 인민군 애국 보국단을 빨리 조직해야 한다고 설쳐 댄다. 우리 마을에는 3명을 할당했다. 그중에 삼촌도 차출되고 말았다. 숙모는 왜 하필 우리 영감을 차출했느냐고 울며불며 항의를 했지만 오히려 반동으로 몰아갔다. 내일 당장 현장으로 떠나야 한다고 재촉을 한다. 보국대의 주 임무는 괴뢰군 전투 현장으로 밥과 수류탄 탄약 등 보급품을 져 나르는 일이다. 누구를 위한 보국인데 생명까지 내놓아야 하는가?
보국대원들의 생명이야 파리 목숨이다. 함께 갔던 다른 사람들은 일이 주 만에 모두 돌아왔는데 삼촌은 삼 주가 넘도록 소식이 없다. 삼촌이 죽었다고 숙모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다. 삼 주째 어느 날 후줄근한 괴뢰군복 차림으로 삼촌이 돌아오셨다. 삼촌은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전선을 몇 번이나 옮겨 다니며 죽을 고비를 깡다구로 넘겼다고 했다.
혹여라도 공비를 생포한 반공 마을이란 정보를 동(洞) 위원장이 알면 큰일이다. 다행히 위원장은 우리 마을과 1㎞ 이상 떨어진 마을이라 몰랐을 수도 있다.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가뜩이나 마을의 식량 사정이 바닥날 정도로 어려운 실정인데, 또 점령군의 횡포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동(洞) 위원장은 군량미와 부식을 배정하고 악착같이 걷어간다. 불응하면 반동으로 몰아간다. 점령군의 횡포를 그 누가 거역할까? 빠른 시일 내에 국군의 수복을 바랄 뿐이다.
(8)후퇴하는 인민군 패잔병들
노란 군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3일간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국군에 밀려 후퇴하는 인민군 패잔병들이다. 어림잡아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진격해 오는 국군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퇴로를 산간 오지로 택했을 것이다.
결국 UN은 한국을 돕기 위해 다국적군이 참전키로 결의했다. 영국을 비롯한 16개국이 군대를 파병하기로 확정함에 따라 중국도 군사 개입 명분을 확보한 이상 만반의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민군 주력부대가 후퇴하는 것으로 보아 국군의 입성이 코앞에 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살았구나,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국군은 UN군과 함께 일사천리로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했다. 선도 부대는 이미 압록강까지 진격해 갔지만, 미리 반격 준비를 하고 있던 중국이 엄청난 중공군을 투입시켜 물밀 듯이 밀고 내려왔다. 우리는 그들의 인해전술에 밀려 점령지를 다 내어주고도 서울 이남까지 다시 밀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패잔병들의 역공격은 후퇴하는 우리 군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었다. 급기야는 1'4후퇴라는 뼈아픈 패배를 맞고 말았다. 수많은 국군과 피란민들이 죽어갔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우리 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었다. UN의 결의로 드디어 휴전을 맞게 되었지만, 통일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기회가 전광석화처럼 후다닥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휴전이 조인되고 그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이 났다. 비록 남북 경계선은 38선이 아닌 휴전선으로 결정됐지만, 이제 우리 마을에도 모두가 염원하던 평화가 찾아왔다. 그것이 비록 시한부 평화라도 좋다. 시간을 두고 인내와 타협으로, 양보와 소통으로 남북 간에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통일을 못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휴전선 철조망도 말끔히 걷힐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2016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전병하 씨의 '에스케이프'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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