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池吾) 이경희 선생은 광복 이후 초대 대구시장(당시 대구부윤)과 경상북도 부지사, 매일신문(당시 남선경제신문) 사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지만, 우리 근현대사에서 잊히다시피 한 인물이다. 물론 대구 수성구 만촌동 망우당공원에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공적비'가 있긴 하다. 그러나 지나가는 시민 누구 하나 이 공적비에 주목하진 않는다. 따라서 대구시민들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까지 그 어렵고 힘들었던 시대를 꿋꿋하고 당당하게 버텨온 자랑스러운 인물을 '1대 대구시장'으로 모셨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지오 선생이 잊힌 데에는 본인의 탓(?)도 크다. 이경희 선생은 그의 호 지오(池吾: '나라 잃은 못난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지,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광복 이후에도 가족들에게조차 본인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활동 중에는 비밀결사와 관련된 것이 많아 기록이나 자료도 많지 않다. 특히 신민회 청년학우회 한성지회의 일원으로 김좌진, 이회영, 이동영 등과 함께한 서간도 망명시절의 상황은 간접적인 증언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망명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숨겨둔 다량의 무기가 들통나 야반도주하다시피 국내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지오 선생은 고종 17년(1880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시 북구 서변동)에서 아버지 이병두와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 이강희 선생도 독립운동가이고, 처남, 사돈 등도 모두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윤치호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했고, 서간도에서 교육계몽운동과 무장독립투쟁을 벌였으며, 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경희 선생 본인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았지만, 우리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열들의 삶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오 이경희 선생의 삶을 재발견하고 현창(顯彰)하는 것이야말로 대구시민의 긍지를 찾고, 미래의 통일한국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매일신문사와 대구광역시는 오늘(7월 7일)부터 10월 3일까지 대구문화재단과 대구문화예술회관의 후원으로 '대구근대역사관'에서 을 주제로 매일신문 창간 70주년 기념 전시회를 개최한다. 관람시간: 평일 오전 9시~오후 7시, 주말 및 공휴일 오전 9시~오후 6시. 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료는 무료. 053)606-6430.
※ 약력
1880년 대구 무태(서변동) 출생
1910년 신민회 결성, 신민회 경북지부장
한일합방 서간도로 망명
1922년 항일무력단체 의열단 가입
1923년 의열단 사건에 연류 징역형 선고'복역
1927년 신간회 경성본부 총무간사 겸 경북지회장
1928년 밀양경찰서에 의해 검속(檢束), 창씨개명 거부
1945년 광복 후 경상북도 부지사
1946년 초대 대구부윤(현 대구시장 겸임)
1949년 남선경제신문(현 매일신문) 사장 취임(7월 1일)
1949년 별세(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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