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봉이 김선달

우리만의 슈퍼히어로, 웃음·눈물 쏙 빼네

조선 설화 속 김선달 현대적 재창조

권선징악·모험·로맨스 적절히 버무려

허점 보이지만 권력자 향한 한 방 통쾌

영화 이끄는 유승호 카리스마 아쉬워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던 바로 그 '김선달'이 영화의 영웅 캐릭터로 등장한다. 홍길동, 전우치, 일지매, 임꺽정 등 우리 설화 속 의적 캐릭터가 영화 속 영웅 주인공 캐릭터로 각색되어 재탄생하는 것은 신선한 아이디어이자 반가운 일이다. 할리우드에 슈퍼히어로 장르가 30년째 탄탄하게 반복과 변주를 거듭하며 하나의 장르로서 안정적으로 제작되어 유통되듯이,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영웅 이야기가 필요하다.

난세에 나타난 영웅이란, 판타지 캐릭터일지라도 돌파하기 어려운 비참한 현실을 이겨낼 대리만족 기제로서 역할을 한다. 어려움에 처한 집단에게 악당이나 강자에 맞서는 인물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주며 동시에 희망과 용기를 솟구치게 한다.

조선 후기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설화 속 김선달은 평양 출신 재사인데 서울에 왔다가 서북인 차별 정책과 낮은 문벌 때문에 뜻을 얻지 못하여 탄식하던 중 세상을 휘젓고 다니며 권세 있는 양반, 부유한 상인,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상대로 골탕을 먹인다. 김선달은 불합리와 차별로 가득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풍자적 인물인 것이다.

김선달이라는 캐릭터는 이 시대에 맞게 재창조될 가능성이 풍부한, 훌륭한 우리만의 문화 콘텐츠다. 역시나 여름방학 성수기에 대작 스펙터클 어드벤처 영화로 제작되었다. 아마도 이번에 흥행에 성공하면 프랜차이즈 상품으로 후속작을 기획할 터인데, 그게 가능할지 지켜볼 일이다.

조선 효종시대, 두둑한 배포에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희대의 천재사기꾼 김선달(유승호)은 위장 전문 보원(고창석), 복채 강탈 전문 윤보살(라미란), 사기 꿈나무 견이(시우민)와 함께 온갖 기상천외한 사기 행각을 벌이며 조선 최고의 사기패로 조선 팔도에서 명성을 떨친다. 김선달 일행은 조선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는 담파고(담배) 탈취라는 새로운 판을 준비하던 중, 그 배후에 당대 최고의 권력가 성대련(조재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성대련에게 견이가 붙잡히고 고초를 당하자, 즐기며 사기 치는 것을 철칙으로 삼던 선달은 성대련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준비한다. 선달은 '주인 없는 대동강'을 미끼로 인생 최대의 사기판을 꾸민다.

재미와 모험, 권선징악, 웃음과 눈물, 로맨스와 가족애가 절절히 배합되었다. 흥행을 노린 기획영화로서 모든 것을 한 그릇에 집어넣어 비볐다. 재미만 따진다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볼거리와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게 하나의 주제로 꿰어지며 플롯상에서 커다란 줄기를 이루지는 못한다. 에피소드는 흩어지고 웃음은 단발성이며, 김선달이 인간적인 각성을 통해 거듭나는 장면은 인위적이어서 감정적으로 설득되기가 힘들다.

별다른 배경이 없는 김선달이 천하의 관료들도 쩔쩔매는 희대의 사기 행각을 벌이는 과정은 세밀한 묘사가 생략되어 있어 논리의 허점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권력자들을 향해 한 방 먹이지만, 과정상의 치밀함이 결여되어 있다 보니 결과를 보고 통쾌해하라는 주문만 던지는 꼴이 된다. 자잘한 사기 행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의 나열로 이루어진 전반부와, 일대 각성을 통해 한판 큰 복수극을 펼치는 후반부의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 전반부의 김선달은 유들유들하지만, 후반부의 김선달은 비장하다. 이것은 캐릭터의 성장이라기보다는 영화적 결이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유려하며 건들거리다가 또 영특하며 인간적인 캐릭터인 김선달을 연기하기에 배우 유승호는 아직 덜 성숙한 것 같다. 자유자재로 변신을 해내는 수려한 외모는 훌륭하지만, 왕실과 최고 권력자들을 농락하기에 적절한 카리스마를 덜 갖추었다. 전형적인 모험전, 코믹 상황을 만들어내는 조연배우들의 활약, 적절한 권선징악 주제 등으로 영화를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딱 그만큼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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