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해체' 또는 '파괴'를 뜻한다. 한국어 제목이었으면 영화의 정체를 조금은 알고 극장 안으로 들어갈 텐데, 원어를 그대로 사용한 점 때문에 자칫 액션영화로 오해하기 쉽다. 다 때려 부수는 장면이 수시로 나오지만, 액션이 아닌, 심리 드라마다. 캐릭터와 설정이 꽤 흥미진진하다.
잘나가는 투자분석가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분)는 장인 소유의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며 명성과 부를 축적한다. 미국 뉴욕 근교의 커다란 저택, 착한 아내, 미래가 보장된 직업. 그에게는 결핍이 없어 보인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아내는 즉사하지만, 데이비스는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다. 자, 그러면 아내 덕에 잘나가던 그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질까. 전혀 아니어서 당혹스럽다.
데이비스는 슬프지가 않아서 힘들다. 아내의 죽음을 안 순간에도 병원에 설치된 자판기의 초콜릿이 기계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게 더 짜증이 나고, 배가 고픈 것에만 신경이 가 있을 뿐이다. 장례식에서 모든 이들이 데이비스를 걱정하고 위로하지만, 그는 남의 이목이 두려워 화장실에서 우는 연습을 해본다. 멀쩡히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고, 멀쩡히 밥을 먹고, 멀쩡히 회사로 출근한다.
영화를 연출한 장 마크 발레 감독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에서 매튜 매커너히의 압도적인 연기를 끌어내어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겼고, '와일드'(2014)에서는 배우 리즈 위더스푼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두 영화는 모두 삶의 나락에 떨어진 이들이 갱생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방탕한 에이즈 환자의 삶의 분투기(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와 탕녀의 모하비 사막 횡단(와일드)을 그리되, 사건보다는 캐릭터의 심리를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이므로, 그의 영화를 보면 사람이 길게 남는다.
이 영화 역시 보고 난 후 주인공을 연기한 제이크 질렌할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오래도록 새겨진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가 사라져서 슬픈 게 아니라, 도무지 슬프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더 힘들다는 것. 그는 이 감정의 정체를 엉뚱한 곳에서 나눈다. 자판기 회사의 고객센터 직원 캐런(나오미 와츠 분)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평소 거슬렸던 물이 새는 냉장고를 때려 부수고, 회사 화장실의 삐걱대는 문을 뜯어내며, 평소 버그를 일으키곤 했던 컴퓨터를 산산이 분해한다.
파괴 후에 새롭게 생성할 수 있다는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려는 것인 양, 그는 계속해서 때려 부순다. 15살 말썽쟁이 아들 크리스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 캐런은 삶에 지쳐버린 상태다. 각자 결핍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세 명의 인물들이 관계를 형성한다. 사실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극도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상류층의 데이비스는, 매일매일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캐런과 비밀을 간직한 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루저로서의 미래가 남은 크리스와 교류할 일이 없다. 하지만 무너져 내리기 직전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욕망 없이 진솔하게 마음을 나누자, 삶의 욕망이 되살아난다.
인물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봐줄 때, 몸을 가린 명품 슈트를 벗고 망치를 들고 육체노동의 고통을 경험할 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거리에서 손발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춤을 출 때, 가진 것을 다 내던지고 파괴할 때, 우리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릴 때 진정 삶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마주한다. 변화란 이전의 것을 버릴 때 가능한 것이다.
데이비드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카메라, 심리와 조응하는 깊이 있는 음악, 섬광처럼 떠오르는 그 옛날의 따사로운 이미지가 불현듯 삽입되는 편집술 등으로 인해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는 과정은 조용하게 '힐링'하는 과정이다.
화려한 이미지와 꽉 짜인 서사, 청각을 자극하는 복잡한 사운드로 가득한 블록버스터 시즌에 이 기이한 영화가 파이팅할지는 의문이지만, 영화를 통해 다양한 삶의 이면들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긴 잔영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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