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스케이프<3>-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삽화: 이태형 화가
삽화: 이태형 화가

4. 시련

노임이 있는 곳엔 항상 내가 있으리라는 일념으로 싫고 좋고를 안 가리고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힘든 일을 싫어하는 러시아 남자들의 습성 때문에 더러는 운 좋게 일을 만날 수가 있었지만 당시엔 러시아도 경제 상황이 어려워서 일자리를 얻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래도 조직의 사슬에서 풀려나 감시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사실과 도시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어려움을 희석시켰다. 언젠가는 나도 저들처럼 근사하게 누리면서 살고야 말 것이란 야망이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모르겠다.

처지가 처지인 만치 일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덤벼들었다. 그렇지만 일거리를 만나기가 여간만 어려운 게 아니어서 끼니를 굶어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다반사였다. 도시로 나가면 당장 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고 내가 그 정도로 순진했었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되었다. 삶이 호락호락하리라 여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의 생은 어째서 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풀기가 난해하고 힘든 것인지, 마음고생 또한 육체노동 못지않았다.

무작정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안 되면 주택가로 들어가서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통사정을 하였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성실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애원해가면서 근근이 몇 달을 버텼으나 내 한 몸 건사에도 쩔쩔매는 판국에 약속한 날짜는 다가오고 조바심 때문에 하루하루가 생지옥 같았다. 그 큰돈을 무슨 수로 만들 수가 있을 것인지, 죄 안 짓고 순수한 노동의 대가로 돈을 모으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를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상납할 돈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는 날이 계속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약속한 날이 지나가자 화가 난 간부로부터 귀국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어떻게 갈 수가 있겠는가. 도저히 빈손으로 귀국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조금만 참아 달라고 사정한 상태에서 또다시 두 달이 흘러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내게 돈이 되는 일자리는 없었다. 인맥, 그것만큼 소중한 재산이 없다는 사실을 그때 사무치도록 실감하였다.

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시장에서 중국 상품을 구해다 파는 고려 여자 '문 세리나'를 알게 되었다. 인맥의 중요성을 터득하고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던 나는 그녀에게 인간적인 친절과 성실한 마음으로 다가갔다. 만약의 경우, 비상사태에 대비할 수도 있을 것이란 영악한 계산이 먼저 있었다는 편이 훨씬 양심적인 고백이 될 것 같다.

그녀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타슈켄트에서 돈을 벌기 위해 흘러들어 온 이혼녀였다. 그래서인지 우린 금방 의기투합해 외로움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도움이 절실할 땐 믿을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편이 혼자인 것보단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우리는 그녀의 딸 타냐와 함께 허름한 아파트 3층을 임차해 한 가족이 되었다.

얼마 안 가, 주야로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연합기업소에서 나를 잡아들이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내 주거지를 알아낸 보위부원들이 불시에 들이닥쳤다. 그들의 근성은, 할 수만 있다면 모기 다리에서도 피를 빼겠다고 덤빌 만치 몰강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번개같이 침대 밑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 운이 좋았던지 세리나가 기지를 발휘해 겨우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하였으나 안도의 숨도 잠시뿐, 그날부터 난 도리 없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외출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챈 세리나가 발 빠르게 멀리 도시 외곽에 떨어져 있는 어떤 독신 할머니의 집 창고 방을 하나 빌려 들었다. 처지가 처지인 만치 이사는 야심한 밤에 도둑처럼 몰래 하고 숨죽인 채 지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는 먹고살 방도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다니게 되었는데 속으론 항상 불안과 초조, 두려움으로 가득하였다.

5. 체포

의기소침해 있던 어느 날. 결국 러시아 경찰을 앞세우고 들이닥친 보위부원 2명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같은 벌목공 출신인 동료가 밀고자였단 사실을 잡혀가면서 알았다. 쇠고랑을 차고 끌려나가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하지만 이것이 내게 닥친 운명이라면 가서 합당한 처벌을 받고 난 후에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연신 자신을 달랬다. 모처럼 구경거리를 만난 이웃 사람들이 너도나도 문밖으로 나와서 쳐다보고 수군거렸지만 그 순간엔 부끄러워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게 해서 지역 건설부가 있는 곳까지 끌려간 나는 다음 날 수갑을 찬 채 기차 편을 이용, 연합회사가 있는 지역으로 압송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사무실 겸 숙소로 보이는 컨테이너로 들어가자 그들은 즉각 내 수갑을 풀어주더니 느닷없이 바지를 벗기고 깁스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중죄인에게만 사용하는 탈출 방지용으로 다리 관절을 쓰지 못 하도록 만든 기구인데 그걸 나한테 씌웠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깁스를 착용하자, 내가 나서 자라고 30여 년 충성을 바쳤던 조국이 어찌 인민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배신감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매달 100달러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 한데 대한 보복치고는 너무나 극악한 처사였다. 그냥 단순히 수갑만 채웠더라면 나도 모든 것을 운명이라 체념하고 벌 받는 일에 순응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과연 깁스를 차야 할 만큼 중죄인인가 싶으니 거센 분노와 반항심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아침에 피었다가 해지면 떨어지는 무궁화같이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너무나 허망하다는 상실감에 절망하였다. 그대로 잡혀가면 분명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매장시킬 게 뻔한 일이라, 순간적이지만 자살 충동이 일어났다. 무슨 수로 목숨을 보전하고 이 수모를 갚을 것인가, 자살보다 더한 자기주장은 없을 것만 같았다.

살인을 한 것도, 도둑질한 죄인도 아니다. 다만 간부에게 약속한 뇌물을 제때에 바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짐승 같은 중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모멸감과 인간에 대한 통렬한 회의로 원통하였다. 그 상태에서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은 절망과 좌절의 깊이를 더했다. 공권력이라는 막강한 절대 권력 앞에서의 내 존재적 가치란, 한낱 검불에 불과하단 사실이 너무나 기막히고 원통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에 나와 다른 사람 사는 모양을 보고 머리가 트였지만, 그래도 조국에 대한 증오심은 없었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위기에 처하게 되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보위부원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살인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로구나, 살인도 불사할 것 같은 자신한테 놀라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뿐만 아니라 절대 이런 식으로 끌려가진 않겠다는 반발과 오기가 독사 대가리처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낀 순간부터 뇌리에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모색하느라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살피다 보니 컨테이너 한쪽 귀퉁이에 10㎝가량의 작은 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패전 무렵 연합 지원군을 만났던들 그리 반가울까. 순간적이지만 '이젠 살았다' 하는 환희를 느꼈다. 절대로 이렇게 당할 수 없다는 오기에다, 용기와 원기가 보태졌다. 그래도 보위부원들 앞에서는 짐짓 자포자기한 채, 지극히 온순한 행동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고 또 순종했다.

목이 떨어지고 난 뒤에 지구를 내게 준들 무슨 소용이랴. 어떻게 해야 저 칼을 손에 넣을 것인가,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촉각을 곤두세운 채 범이 먹이를 노리듯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어느 날, 마침내 감시원들끼리 한담을 나누는 사이에 칼을 훔치는 데 성공했다. 실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 찰나의 일이었다.

상황이 바뀌자 마음은 왜 그렇게 초조하고 조급한지 촌음이 몇 년같이 느껴졌다. 소매 안에 감춘 칼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미구에는 반드시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안내해 줄 기적의 천군만마임을 믿었다. 불은 분명 모든 것을 삼킬 만치 무섭고 위험한 것이지만 다스리기에 따라선 더없이 편리한 온열과 빛이 있는 것이므로 모험을 해 볼 가치는 충분하였다.

▨바로잡습니다=지난주 주간매일 16면에 실린 전병하 씨의 '에스케이프' 2편은 '수필 부문 가작'이 아니라 '2016년 매일 시니어문학상 전체 대상작'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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