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의 레벨은 얼굴 두께와 비례한다. 한적한 일식집의 칸막이 식당보다 오픈된 대중 레스토랑의 다인석이 훨씬 난도가 높은 건 당연한 이치다.
유감스럽게도 기자의 얼굴은 거의 '습자지' 수준. 낯도 많이 가리고 누군가 시선만 의식해도 얼굴이 벌게진다. 이런 소심한 기자가 혼밥, 혼술 도전에 나섰다. 생각만 해도 낯이 붉어지고 뒤통수가 간지러워지지만 혼놀족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느끼는 데 이 방법이 최선일 듯싶어서다. 대구 중구 동성로 일대서 혼밥, 혼술, 만화카페 등을 돌아봤다.
◆시내 중심가 라멘집서 '혼밥' 도전
혼밥 체험 첫 번째 코스는 매일신문 근처 라멘집 '산쪼메'로 정했다. 몇 해 전 일본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맛보았던 라멘 맛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데다 가까이에 일식집이 있어서 쉽게 정해졌다.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데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어서오세요) 합창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생소한 일본식 손님맞이는 가뜩이나 주눅 든 기자를 더 위축시켰다. 창가 구석 1인석에 자리를 잡고는 돈코츠 라멘을 시켰다. 라멘의 여러 메뉴 중 돼지 뼈로 국물 맛을 낸 이 음식이 가장 내 입에 맞다.
무척 쑥스러울 거란 예상과 달리 기자는 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전체 손님 중 절반가량이 혼자 온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책이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서로 의식할 일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패밀리레스토랑 복판 테이블로 가볼걸' 하며 킥킥거리는 사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이것도 기념인데 휴대폰에 담아볼까? 하다가 주위의 눈치가 보여 슬쩍 포기했다. 아무도 날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래도 덜컥 멈춰 서게 하는 어떤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얀 육수가 식욕을 돋우며 입맛을 자극했다. 고대했던 국물을 목젖으로 흘려 넣는 순간 "와~" 하는 감동이 밀려들었다. 면을 씹으니 면 가락의 세세한 식감까지 모두 혀끝에서 살아났다. 혼밥 마니아들이 그토록 떠들어대던 '음식과 진정으로 일대일이 된다'는 경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쪼메 조미경(39) 대표는 "시내 중심가라서 그런지 솔로 손님 비중이 30%를 넘어선다"며 "이분들은 정말로 한 끼를 소중히 여기며 자신을 위해서 진정한 한 끼를 드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레스토랑서 혼술 도전 10분 만에 포기
혼밥의 '연착륙' 덕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내친김에 탄력을 붙여 퇴근길에 생맥주 한잔하는 걸로 콘셉트를 잡았다. 동성로의 한 주점이 마지막까지 유력 후보에 올라왔지만 독주(毒酒)를 못하는 기자의 한계 때문에 최종 심의(?)에서 탈락했다.
반월당 근처 한 레스토랑의 문을 호기롭게 열고 들어갈 때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홀 안에 들어서 식당과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식당은 한 끼 먹으러 왔다는 목적성이 명확하지만 술집은 기호(嗜好)나 선택의 영역이라서인지 자신감이 떨어졌다.
4인 테이블에 혼자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으니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생맥주 500㏄와 안주로 크로켓과 포테이토를 반반씩 시켰다. 홀 안엔 대부분 단체손님뿐 혼자 온 손님은 기자밖에 없었다. 홀 한구석에서 혼자 맥주를 홀짝거리니 모든 촉수가 곤두서고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손님 절반가량이 혼자여서 서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라멘집과는 천지차이. 라멘집에서는 음식을 계속 먹으니까 그 동작에 집중하면서 어색할 겨를도 없었지만 술집은 달랐다. 밀려드는 어색함을 달랠 소품은 스마트폰뿐이었다. 죄 없는 폰만 만지작거리다 10여 분 만에 탈출하듯 나와버렸다. 혹시 다음에 혼술에 도전한다면 그땐 커튼, 파티션이 쳐져 개인공간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전문 주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심 속 만화카페서 멍 때리기
혼놀문화 마지막 체험코스는 만화카페.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동성로에 '골방'이라는 곳이 떴다. 최근 급부상하는 젊은 층 휴게문화라는 말에 조금 위축되었지만 '설마 내치기야 하려고' 식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1층 로비는 여느 만화방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대형 서가엔 만화, 잡지들이 꽂혀 있고 한편에서는 음료와 간식거리를 팔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손님 대부분은 10대 학생과 20대 대학생들이 전부였다. 객실로 들어가는 길,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의 출현에도 다들 무신경했다. 직원에게 부탁해 제일 구석자리 방을 안내받았다. 1평 남짓한 방에 들어서 우선 몸을 눕혔다. 방 앞에 친 얇은 천 하나가 안과 밖을 경계 지우고 있었다. 한 10분쯤 넋 놓고 마냥 누워 있으니 한없는 평화가 밀려왔다. 누구 말대로 택배기사도 안 오고 경비원 인터폰도 없으며 선교를 다니는 열성 교인도 없는 청정지역이었다. 10분쯤 있다 만화책을 펴들었다가 바로 접어버렸다. 이 좁은 공간에서 멍 때리는 자체로 아주 좋았다.
나오는 길에 홀을 돌아보니 손님의 20% 정도는 혼자였다. 아예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든 학생도 있었다. '골방' 직원 오치훈(28) 씨는 "작년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대부분 커플, 친구들끼리 오는 손님이었는데 불과 1년 만에 나 홀로 손님이 20, 30%가 늘었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동성로 인파 속을 헤치고 나오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심의 한복판에 이런 '단절의 공간'이 성업하는 현실에 많은 의문과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밀려오는 이상한 예감 하나가 있었다. 오늘은 체험을 위해 이 공간을 찾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손님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 것 같다는 확신감 같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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