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이강희(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독립운동가 이강희는 1898년 2월 17일 대구 무태에서 태어난 이경희 선생의 친동생이다.(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부산 사람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어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경희 선생이 서간도로 망명할 때, 동생 이강희도 함께 따라갔다. 상당히 영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도움으로 상해 호강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부인 강씨(작고)에 따르면, 호강대학 재학시절 친선 축구팀에 끼여 일시 귀국했을 때 상해임시정부의 비밀편지를 가지고 와 국내에 전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은 이경희 선생 집안의 하나의 업(業)이 된 셈이다.
1919년 5월 당시 상해학생회 및 청년단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3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경상도)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12월 23일 학생회장으로서 재상해선인학생회(在上海鮮人學生會)를 개최하고 윤해, 주요섭, 박헌영 등을 초빙해 강연을 시키기도 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이강희는 큰형 이경희 선생이 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되자, 국내로 돌아와 신간회 부산지회 총무, 부산학우회 서무간사, 부산협동조합장 등 민족운동에 전력했다. 아마도 이런 부산에서의 활발한 활동이 부산 출신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강희의 대표적 독립활동 중 하나인 'ㄱ당 사건'은 대구 중심부에서 진행됐다. 1928년 5월 18일, 달성군 성북면(현 대구시) 산격동 냇가에 몇 사람이 모여 앉아 1차 회의를 열었다. 이에 앞서 그해 4월 하순 문상직의 대구 시내 하숙집에서 만나 '시대를 개탄하고 민족 운동의 횃불을 켜야 하겠다'는 뜻을 모았다. 문상직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무장단체 '학우회'에 가입한 뒤, 국내에 들어와 폭탄습격을 준비하다 1920년 검거되어 징역 5년형에 처해졌으나 4년으로 감형되어 막 출소한 상태였다.
이들은 신간회나 근우회의 야학이나 강연회 같은 것으로는 (독립의) 뜻을 이루기 어려우니, 좀 더 직접적인 방법을 취하기 위해 비밀단체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문상직 이외에 함께한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이상화(대구가 자랑하는 우리나라 대표적 민족시인 이상화가 바로 이 이상화다)는 모두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였다.
1928년 5월 20일 오후 2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달성공원의 한적한 숲속으로 청년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이상화, 문상직, 유상묵, 이강희 등이었다. 당의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미회(未會: 기미년의 未), 혁진당, ㄱ당, 바바당 등이 제안되었으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쉬운 'ㄱ당'으로 정했다. 'ㄱ은 한글의 첫째로 한국의 바탕을 뜻한다'고 했다.
ㄱ당의 목적은 '조선인 중 전도유위한 청년을 모아 광동 군사학교에 유학시키는 한편, 만주 방면의 미개지를 개척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조선의 혁명, 독립을 꾀한다'로 정했고, 강령으로는 '조선민족의 절대 해방을 기한다' '우리 운동의 활동 무대를 만주에 둔다'를 삼았다. 목적과 강령 모두 큰형 이경희 선생이 서간도에서 했던 일과 유사했다. 임원으로는 재무부 노차용 장택원, 조사부 이강희 유상묵, 연구부 정대봉 문상직이 선임됐다. 이로써 'ㄱ당'이 결성됐지만, 구체적인 활동 방침과 방법에 대해서는 6월 22일(단옷날) 정하되, 우선 채무를 담당한 노차용과 장택원은 당장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로 했다.
6월 11일 노차용은 동지 곽동영과 함께 오후 9시쯤 해안면 둔산동에 사는 부호 김교식의 집에 들어가 잡지발행 명목으로 5천원을 요구했다. 거부하는 김교식을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5천원의 약속어음을 쓰게 했다. 그러자 김교식은 도장을 숙부가 대구로 가지고 갔으니 후일 등기우편으로 보내겠다고 하면서 이들을 안심시켰다. 노차용과 곽동영은 하룻밤을 김교식의 집에서 머물고 다음 날 아침에 나왔는데, 곧바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되고 나머지 동지들도 모두 체포되어 'ㄱ당'은 와해되고 말았다. 이강희는 이 사건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함께 구속된 경북 출신 인사는 곽동영, 노차용, 문상직, 오진문, 유상묵, 이상쾌, 이상화, 장택원, 정대봉 등 10명이다.
'ㄱ당' 거사에 실패한 이강희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고, 용정의 대성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2세 교육에 힘썼다. 당시 제자였던 아동문학가 박홍근은 대성학교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찾아와 이강희 선생과 영어로 밀담하던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돈 정운일(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0년)
이경희 선생의 맏딸 인원은 1915년 '대구권총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정운일(1884.1.16~1956.2.5)의 3남 인택과 결혼했다. 대구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집안이 사돈인 것이다.
정운일은 이경희 선생이 참여했던 달성친목회에서 서상일, 이시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15년 1월 달성친목회 회원들은 국권회복을 목표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고, 그해 7월 풍기의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해 광복회를 결성했다. 우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것이 첫 과제였다. 대구의 부호 서우순, 정재학, 이장우에게 각각 3만원, 5만원, 2만원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내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대구의 부호들은 광복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 김진만(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이 장인 서우순의 집에 현금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독립운동자금 확보 계획에는 서우순의 아들 서상준과 김진만의 동생 김진우(건국포장)도 함께 참여했다. 거사일로 잡은 1916년 9월 4일 정운일은 최병규, 김진만 김진우 형제와 함께 서우순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침입에 놀란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집사 우도길 등이 달려오자 정운일 등은 총을 쏘며 달아났다. 얼마 후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체포됐고, '광복회의 대구권총사건'으로 불렸다.
대구권총사건으로 체포된 광복회 회원들은 10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김진우 12년, 김진만 정운일 최병규 10년, 권국필 최준명 2년, 박상진 김재열 6월, 이시영 4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운일은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경북도 고문을 지냈으며, 1949년 반민특위 경북조사위원장을 역임했다.
▶처남 조훈(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80년)
독립운동가 조훈(1886.10.29~1938.1.22)은 서간도에서 이경희 선생을 동지로 만나, 신랑보다 16살이나 어린 여동생을 시집보낼 정도로 이경희 선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믿었다. 서간도에서 이경희 선생의 행적이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조훈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은 이 당시 이경희 선생의 활동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참고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조훈 선생은 한일강제병탄 이후 봉천성 장백현으로 이주했다. 3'1운동 이후 장백현 지방에 거주하는 독립투사들의 군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상무회를 조직했으며, 창흥상회를 중심으로 조직이 확대되자 여기에도 가담했다.
또한 1920년 2월에는 장백현에서 이희삼, 이동백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한독립군비단에 가입, 외교부장 및 장백지단의 서기장으로 활약했다. 1921년 10월에는 임시정부 함경남도 교통사무국 사동지국의 지국장으로 임명되어 이계학, 강명환, 김상수, 김만성 등과 함께 일했다.
조훈은 특히 1922년 이르쿠츠크파(全露共産黨)에도 관여했다. 같은 해 장건상, 김하석, 김만겸, 한명세, 이승, 박승만 등 동파의 위원들이 치타 한족회관에 모여 결의한 사항을 모스크바 제3국제공산당에 보고한 것을 비롯해 러시아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처남 조훈의 이 같은 행적으로 미뤄 볼 때, 이경희 선생이 비록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지만 사회주의 계열과도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김구 선생 등 상해임시정부 관계자와 더 밀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님 이단원 여사는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을 매우 싫어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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