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를 잔뜩 머리에 쓴 솟을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가니 검은 편액에 쓰인 흰색 한자가 필자를 맞았다. '大愚軒'(대우헌) '鈍次'(둔차), 대단히 어리석은 집에 아둔하고 이등이라. 겸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옛 선비들의 여유가 부러웠다. 사랑방에는 초로의 남자가 책상에 앉아 연필로 뭔가 쓰고 있었다.
필자가 매년 두어 번 찾는 경주산책의 마지막 코스 '최부잣집'한쪽 전경이다. 예전에는 종갓집 대청마루의 고요함에 이끌려 발길을 돌렸으나 이번에는 이유가 다르다. 대한민국 최고 부자 두 사람 때문이다. 한 재벌총수는 자식들의 재산상속 때문에, 다른 이는 추잡한 섹스 스캔들 때문에 연민의 시선을 받는 듯하다.
돈이 신(神)으로 둔갑한 요즘, 부자는 세상의 절대자다. 무소불위의 권력자조차 돈 앞에는 꼼짝 못한다. 그래서 뒷집 바둑이조차 선망의 눈길로 그들에게 꼬리 친다. 이 색다른 풍경을 두 사람이 어지럽힌 셈이다. 필자에게 부자는 언제나 관심 밖이지만, 문득 경주 최부자는 뭔가 이색 스토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제법 넓은 마당엔 삼복더위가 달군 황톳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대청마루에 앉아 10년째 최부잣집 지킴이로 활동하는 최용부(74) 씨에게 질문으로 노크했다.
"이 집주인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요?"
"3대에 걸친 근면정신과 청빈한 생활, 그리고 혁신이었지요."
최씨 가문의 방계손인 그의 설명은 거침없고 명료했다. 필자 옆에 앉은 두 관광객이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고 있었다.
"조선시대 병조판서를 지낸 1대 최진립은 청백리라 부와는 상관없고, 용궁현감으로 황무지 개척을 통해 농토를 많이 확보한 2대 최동량이 부자의 서막이었다면, 이양법을 도입해 벼의 획기적인 수확을 올린 3대 최국선이 진정한 최부잣집의 시조로 봐야 되겠지요."
당대에 부를 집어삼킨 요즘 졸부들과 달리 최부자는 3대에 걸친 재산형성과정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자그마치 12대에 걸친 부의 세습과정과 대단원은 어땠을까?
"잘 아시다시피 최씨 가문의 재산 전달은 여섯 가지 행동지침(내용은 지면상 생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상속자였던 12대 최준 씨는 모든 재물을 사회에 환원시켰지요. 상속은 1원도 없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500년 스토리를 들으며 멀리 남산자락을 바라보았다. 뭇 백성으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받으며 이 집에서 눈을 감았던 최씨 가문의 후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휠체어와 가죽의자에 앉은 두 늙은 부자의 희멀건 눈빛이 불쾌하게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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