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천양희의 '하루'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천양희 '하루' 전문)

몇 달을 나를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내 시간을 되새김질했다. 내가 아는 내 이야기와 남이 하는 내 이야기를 차분하게 되새겼다. 내가 아는 내 이야기와 남이 하는 내 이야기 사이에 내가 살았다. 둘은 달랐다. 사실은 둘 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내가 아는 내 이야기는 남이 모르는 내 이야기였고, 남이 하는 내 이야기는 내가 모르던 내 이야기였다. 자주 듣는 말. 이런 세상에서 영혼을 가지면 불편하다고. 영혼 없는 삶이 편하다고. 그런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나? 내 목 위에는 태어날 때부터 달려 있는 머리가 존재하고, 내 가슴 안에는 24시간 피를 돌리는 심장이 뛰고 있는데 말이다. 그놈의 머리와 심장이 인정하지 않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어쨌든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다. 살짝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고요한 시간이었다. 좋았다.

되새김질하는 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바빴다. 모두가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길을 말하고 있었다. 규정을 강조하면서도 규정은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도 했고, 완성도를, 격식을, 권위를, 형식을, 예의를, 법도를, 매뉴얼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거기에 충실하지는 않았다. 자유를 말하면서 스스로는 자유를 실천하지 않았고, 창조를, 개혁을, 내용을, 바닥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권력만을 향유하고 있었다. 배고픈 사람은 여전히 배가 고팠고, 권력은 그들끼리 부대끼면서 부패했다. 숨은 사람은 드러난 사람을 이용하고, 드러난 사람은 이용되는 것도 모르고 숨은 사람이 부여하는 헛된 힘을 즐겼다. 도덕이 사라진 자리에는 욕망의 덩어리만 자라났다. 여전히 비가 오고 능소화도 붉고 바람 소리는 처량하게 귀를 후볐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살았다. 그것이 언제나 신기했다.

새벽에는 여전히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어서 새로운 아침을 준비했고,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지하철이 붐볐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걸음을 안내했다. 식당 아주머니는 음식 재료가 너무나 올랐다고 푸념하면서도 정말 맛이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평생을 모은 재산을 기부한 할머니의 미소를 뒤로하고 서울 최고의 화려한 거리에서 젊은 여인이 무차별 죽음을 맞았다. 로비 브로커의 이야기가 포털을 채우고, 그들만의 싸움에 몰입하는 정치인의 이야기가 논란을 키웠다. 젊은 연예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게시판을 채우는데, 황혼이혼 남편의 반란이라는 기사도 보였다.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에 떨고 있는 사람들 이면에는 수십, 수백억의 배당금을 챙기는 기업주들이 보도되었다. '어르신' '어버이'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이 망가지면서 문자 본연의 의미를 잃은 언어들이 소문처럼 공간을 떠돌았다. 어느 소설가는 세계 3대 권위의 문학상을 받았고, 그 책은 1분에 2천 부가 나가는 호황을 누렸다. 좋은 작품이어서 읽히는지, 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읽히는지, 도대체 형식과 내용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 가습기로 온통 난리고, 아파트는 물이 새고, 도로가 온통 누더기란 보도도 들렸다. 이런 일들은 사실 하루에 벌어지는 일이다. 내일은 또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질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삶은 하루를 아무런 일이 없는 듯이 채운다.

모두들 모난 돌로만 채워진 칼날 같은 문자로 된 언어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자꾸만 날카로운 언어로만 채워지는 내 내면의 목소리, 더는 무디어질 것도 없는 마음들만 등과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타오르지도 녹아 흐르지도 않는 안개 너머로 막막한 어둠의 등이 보이고 종일 표적도 없는 돌팔매질이나 하다 돌아가는 내가 거기 보였다. 남은 마음이 아무것도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그렇다. 움직이는 마음의 선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사실 감정의 흔들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건 오히려 복잡한 도형 그리기만큼이나 답답한 일이다. 찢어진 그림 맞추기만큼이나 답답한 일이다. 바람이 길을 멈추고 내 삶도 비에 젖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고,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거짓말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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