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장기판 졸(卒) 신세

중국이란 큰 나라 옆에서 살아야 하는 지정학적(地政學的) 숙명 탓인가. 한민족 흥망성쇠는 중국 정세와 긴밀하게 연관됐다. 중국이 분열되거나 혼란스러웠을 때 우리 민족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반면 중국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들어섰을 때엔 혹독하게 핍박당했다. 한(漢), 당(唐), 원(元), 청(淸)과 같은 나라는 우리 민족에게 쓰라린 고통을 안겨줬다.

지난 150여 년간 중국은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서구 열강의 침략, 일본과의 전쟁, 국'공 내전, 문화대혁명 등을 겪으며 중국은 자신을 추스르기에도 힘이 부쳤다. 중국이 정신이 없을 때 우리는 압축적 경제성장을 통해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었다. 중국 영향은 받지 않고, 미국 도움을 받아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은 것이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중국이 강해지면서 우리에 대한 중국의 영향이 급속도로 커졌다. 현재의 중국은 과거 여느 통일제국에 비견될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 끼치는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그 단적인 장면이 26일 폐막한 라오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한'중 외교장관회담에서 표출됐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비외교적인 언어'로 한국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공개석상에서 손사래까지 치며 상호신뢰 훼손을 거론하는 등 외교적 무례함을 보였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에 대해 중국이 항의를 표출한 것이지만 한국에 대한 중국의 근본적 인식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중국 처지에서 본다면 사드 배치는 한국이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로 편입된 것이고, 미국의 중국 봉쇄전략에 동참한 것을 의미한다. 미국'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심하던 한국이 사드 배치 결정으로 미국을 '선택'한 것으로 중국은 보고 있는 것이다. '혈맹'(血盟)이라고 하는 북한의 외무상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왕이의 행동에서도 중국의 속내를 유추할 수 있다.

국내에서 사드 배치는 뜨거운 감자이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도 사드는 첨예하고 민감한 사안이다. "사드 배치 문제가 불거진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도발에 기인한 것"이라는 우리 정부의 해명은 중국에 전혀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다. 사드에서 밀린다면 남중국해 문제 등 정치'경제'군사 여러 사안에서 미국에 계속 밀리게 된다는 것이 중국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우리에 대한 중국의 압박 강도는 다방면에 걸쳐 매우 거세다. 중국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한국산 화장품 품질 문제를 걸고넘어지고, 중국 내 탈북자를 다시 체포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다. 중국에 수출되는 전기강판에 반덤핑 관세도 부과하기로 했다. 치맥축제에서 보듯 대구를 비롯한 자매도시와의 교류도 취소'축소하고 있다. 대국(大國)답지 않은, 이 같은 일이 더 많아질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도식적인 비유라 할 수 있겠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를 장기판에 비유할 수 있다. 미국'중국이 초(楚)와 한(漢)이 돼 싸움하고 있다. 말을 잘 듣는 일본은 미국의 차(車)나 포(包)쯤이 될 것이다. 예전보다 친밀도가 약해졌지만 북한 역시 중국의 차와 포에 비견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미국'중국에게 장기판의 어떤 말일까? 중국에 경도되면서 미국을 섭섭하게 만들고, 사드 배치로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한국은 양국에게 차, 포는 고사하고 졸(卒)로나 여겨지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네 강대국이 한반도를 놓고 충돌하는 지금의 상황이 110여 년 전 구한말과 너무도 빼닮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국권 상실이란 비극을 맞았다.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민정수석 문제로 국정 수행에 발목이 잡힌 대통령, 사드 배치 결정 순간 백화점에 옷을 수선하러 간 외교부 장관이 미국'중국 충돌 속에서 거센 파도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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