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진철 씨가 대구시산악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는데 인터뷰 준비 좀 해보죠?" 데스크의 지시를 듣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박상렬, 장병호, 박무택에 이르기까지 지역 산악인 계보를 대충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차진철'이란 이름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포털 탐색에 들어갔다. 예상 밖의 기록들이 튀어나왔다. 히말라야 14봉 중 7좌 완등, 가셔브롬 1봉(8,068m)과 2봉(8,035m)은 한꺼번에 등반. 중국의 충모강리(7,048m), 릉보강리(7,095m) 연속 등정은 세계 최초였다.
이런 실력자를 여태 알아보지 못했다니. 인터뷰를 위해 테이블에 마주 앉으면서 의문은 바로 풀렸다. 첫째는 이미 여러 차례 언론에 소개됐음에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 필자의 게으름이었고, 둘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일에는 앞장서고 공(功)은 숨기는 성격상 세간에 쉽게 노출이 안 됐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번에 회장 선거를 치르며 내홍을 겪었고 이제 겨우 봉합을 마친 상태였다. 지역 산악인의 수장(首長)으로 첫걸음을 떼는 그를 동대구로 사무실에서 만나보았다.
◆산악연합회장 선출 과정서 큰 갈등
"여기 명함 받으시죠. 한 기자가 제 명함의 최초 수령자입니다." 활짝 웃으며 건넨 명함엔 근래 차 회장이 겪었던 마음고생이 그대로 투영돼 있었다. 최근 한국 체육계의 가장 큰 이슈는 전문 체육단체와 생활체육회의 통합이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추진된 데다 성격이 다른 두 단체의 결합에 불협화음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대구에서도 일부 단체에서는 소송도 있었고 전국 시도협회 중 5곳이 아직도 집행부를 꾸리지 못하고 있다.
대구시산악협회와 생체협 등산연합회의 통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새로 집행부를 꾸리는 과정에서 일부 회원들이 이의제기를 하면서 한때 고비를 맞기도 했다.
난마처럼 얽혀 있던 집행부 구성 문제는 어느 한 사건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 김종길 전 회장이 대한산악협회장에 출마를 선언했던 것이다. 만약 집행부를 꾸리지 못하면 대구시산악협회는 대의원 자격을 상실하게 돼 선거 전략에 치명적인 손실이 생기게 된다.
지역에서 한국산악회 지도자를 배출하자는 명분 앞에 양측은 대타협을 이룬 후 대구시에 집행부 출범을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대구시산악협회 전임회장이었던 김종길 회장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고 또 명분 앞에 사리(私利)를 거두었던 지역 산악인들의 성숙한 양보가 있었다.(김종길 전 회장은 지역의 지지를 업고 대한산악협회장에 선출됐다.)
◆첫 해외산행서 고산증…완등 실패
포항에서 중고교를 다녔던 차 회장이 등산에 입문한 건 대학(영남이공대)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심폐기능이 약했기에 '건강유지'라는 명분으로 산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난도 훈련에도 호흡에 영향이 없음을 알고 본격 산악인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산행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부모님들도 건축기사 자격증(1, 2급)을 따내자 그의 '외도'를 눈감아 주었다.
영남이공대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 제대를 할 무렵 그는 마음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건 산이 부르는 '호출'이었다. 산에 대한 갈증을 씻어내지 못한 그는 마침내 산악부가 있는 경일대에 편입하면서 산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설악산 토왕빙폭을 거침없이 오르면서 전문산악인으로의 길을 모색하던 그에게 1991년 드디어 해외원정 호출이 떨어졌다. 목표는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20~30㎏ 배낭을 메고 팔공산, 비슬산을 수없이 종주했던 그였기에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 있었다.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그의 완등 가도에 암운이 드리운 건 4,000m 고지. "갑자기 고산증세가 시작됐습니다. 제일 참기 힘들었던 건 두통과 소화불량이었어요. 먹고 나면 소화가 안 되고 밤새 설사를 했습니다."
설사에 탈수까지 겹치면서 그는 4,000m에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 기대주였던 그를 바라보는 선배들의 시각에도 이상 조짐이 생겼고 '차진철은 국내용'이라는 조롱으로 돌아왔다.
◆히말라야 7좌'세븐 서미트 도전 중
첫 번째 등정에서 보기 좋게 좌절을 맛보고 절치부심하던 중 한 달 만에 설욕 기회가 찾아왔다. 대한산악연맹에서 구 소련 코뮤니즘(7,495m) 등정 계획을 알려온 것이다. 몸이 만들어져 있던 상태라 가볍게 완등을 하면서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했다.
히말라야에 목말라 있던 그에게 1994년 초오유봉(8,201m)과 시샤팡마(8,010m) 등정 일정이 잡혔다. 히말라야 첫 도전인 데다 연속 등정이었기에 전력을 다해 매달렸다. 히말라야 여신이 천혜 기후를 베풀어준 덕에 차 회장은 히말라야 14좌 두 곳에 '날카로운 첫 키스'를 남기게 되었다. 이후에도 차 회장과 히말라야의 인연은 참으로 화려했다.
1996년 중국 티베트에서 미답봉이었던 충모강리(7,048m), 릉보강리(7,095m)의 한'중 합동등반대가 꾸려졌다. 악투 끝에 두 개 봉을 모두 등정하며 대한산악협회 깃발과 중국등산협회의 깃발을 나란히 정상에 꽂았다. 2개 봉 연속 세계 최초 등정이었다.
2000년 에베레스트(8,848m)에 등정한 차 회장은 2003년 또다시 히말라야 연봉 연속 등정에 나서게 된다, 이번엔 가셔브롬1(8,068m)과 가셔브롬2(8,035m). 극한과 맞설 체력과 심폐, 근성이 담보되어야 가능하다는 연속 등정에서 차 회장은 또다시 성공했다. 이후 2016년 5월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날리며 또다시 대구 산악계를 흥분시켰다.
현재 차 회장의 등산 캘린더는 3개가 돌아간다. 대구시산악연맹의 등정기록과 모교인 경일대 '세븐 서미트'(7-summit), 그리고 차 회장 자신의 히말라야 14좌 완등기록이다. 현재 7좌째를 찍고 있지만 개인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지역 기관, 단체들의 선양에 우선 나설 생각이다.
한때 유명 외식업체를 3개나 경영했던 차 회장. 산에 빠져든 후 사업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한 곳 다녀올 때마다 가게를 하나씩 정리했습니다. 히말라야 완등 증서는 적금통장을 깨면서 자란대요. 아직 오를 산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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