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중국 대륙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만주 하얼빈에 도착,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던 시대가 있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비행기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렇게 힘든 여행을 하느냐고 말이다. 비행기 여행의 편리함을 거론할 필요까지도 없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평화로 3591번지 백마고지 역에서 철로가 끝나 버리는 지금 우리에게 대륙을 가로지르는 이런 기차여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본 대중문학 작가 하세가와 가이타로의 유럽견문록 '춤추는 지평선'(1929)에는 이 여행 경로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세가와 가이타로가 잡지 특파원 자격으로 도쿄-모스코바 간 국제열차표를 끊어서 1년 3개월 동안의 유럽 여행에 나선 것은 1928년 3월이었다. 그는 도쿄 역에서 저녁 9시 15분 기차로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 부산에서 특급 열차로 13시간 30분이 걸려 경성에 도착한 뒤 다시 중국 안동, 장춘, 봉천을 거쳐 하얼빈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간 것이다. 대륙을 횡단하는 길고 긴 기차여행의 일정은 그렇게 이어졌다.
도쿄역 출발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견문록에는 조선 여정에 관한 내용이 한 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하세가와 가이타로의 조선 여정은 이미 시모노세키의 관부연락선 선창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늘어서서 흘러들어오는 조선인의 백의(白衣)의 행렬'과 마주친 그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땅 시모노세키에서 수많은 조선인과 마주쳤지만, 조선 땅 부산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목도하게 된 것은 일본인과 일본 풍경이었다. 거리를 채우고 있는 일본 광고판을 보면서 '신식민지 풍경'이라고 내뱉기까지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조선 여행 기간 동안 하세가와 가이타로는 조선 자체가 아니라 일본제국 식민지로서의 조선을 보고 있었다. 삼랑진, 김천, 추풍령 등 조선 여정을 다룬 부분에서 주로 묘사된 것은 '철도관사에 내걸린 일장기' 등 일본 땅인 조선, 즉 제국 일본의 광활한 힘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 자본으로 부설된 경부철도를 타고 경성에 도착해서,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이 얻어낸 철도를 이용하여 중국 안동현을 거쳐 만주의 장춘과 봉천으로 향했던 여정을 생각할 때, 제국의 힘에 관한 그의 자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근대사는 철도 확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사람과 물량이 이동하면 어김없이 철도가 들어서고 마을이 생겼다. 철도는 미국의 광활한 땅과 거대한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이와 동일한 의미로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부산에서 중국 하얼빈까지 이어진 철도 역시 아시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시켜가던 일본제국의 힘의 상징물이자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제에 의한 철도 부설은 가난한 조선의 근대화를 이끈 중요한 동력이기도 했다. 철도 부설에 내재된 이 다양한 역사적 함의를 돌아볼 때 역사란 하나의 시각, 하나의 태도로 판단하고 결론 내릴 정도로 단순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고정된 이데올로기, 고정된 정치적 판단에서 벗어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역사는 정확하게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구미래대 산학협력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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