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도동서원, 제대로 보수하라

도동서원 입구 400년 된 은행나무가 주는 감동과 설렘은 언제 보아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경사지 18개의 좁고 긴 계단을 따라 수월루, 환주문, 동'서재, 강당, 장판각, 내삼문, 증반소, 사당으로 이어지는 건축적 구성도 낙동강과 대니산에 기대어 예법과 질서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도동서원에 모신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일찍이 도의정치 실현을 위해 목숨을 던져 절의를 지킨 분으로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 5현으로 평가받는 분이다. 조선 후기의 장현광은 '선생은 높은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지 못했고, 미처 책을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능히 한 세상 유림의 으뜸가는 스승이 되어 죽음으로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고 찬하였다.

젊은 날 함양군수 김종직의 수제자가 됨으로써 정몽주에서 김종직을 거쳐 사림파의 정통과 성리학의 맥을 잇게 되고, 현풍 쌍계서원에 봉안된 것은 1568년 일이다. 임진왜란으로 쌍계서원은 불타고 1604년 전후 사당과 강당, 서원 일각이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당시 전국의 사림들이 앞다투어 참여하는데, 외증손 한강 정구에 의해 규범적인 서원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서원 건립 후에는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후대인 1855년에 건립된 옛 수월루는 화재로 소실되고, 1962년 강당과 사당을 비롯하여 웅숭깊은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담장이 보물로 지정되고 수월루는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필자는 8년 전 대구문화관광해설사가 되어 도동서원에서 근무했었다. 한 달에 두세 번 오고 가며 십이정려각을 끼고 도는 조붓한 시골 길도 좋았지만 다람재를 넘어오는 길은 더 좋았다. 다람재 정상 아래 낙동강은 굽이굽이 끝 간데없이 이어지고, 겨울이면 시베리아 쪽에서 날아온 독수리의 활공이 손에 잡힐 듯 바특이 눈앞에서 펼쳐지곤 했다. 눈이나 비 오는 날은 중정당에 앉아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는 의미의 환주문 너머 그림 같은 경관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숨겨진 보물 같은 돌조각들의 용머리와 사자랄까 해태랄까 만(卍)자 무늬와 꽃잎 무늬, 거북이와 다람쥐 문양이 갖는 갖가지 의미와 서원답잖게 파격적인 장식에 홀리곤 했다. 아아, 시간의 강물은 뒷 강물이 앞 강물을 밀어 400년 세월이 흘렀어도 강학과 제향 공간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에 도동서원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중정당에서 제향 공간 쪽으로 열린 문을 보다가 내 눈을 의심하였다. 중정당의 장석과 둥근 문고리가 최근에 프레스로 찍은 시커먼 철판과 주물 제품으로 갈린 것이었다. 어디선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원 몇 개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다. 400년 세월의 풍파와 수많은 곡절을 넘어 색감과 무늬 결의 미감을 살리면서 최대한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되었을 때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사당 입구 내삼문의 기와도 다 털고 새 기와를 잇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수리와 복원이 아니다. 현재의 보수정비공사를 우려하는 것은 생뚱맞거나 민낯의 얼굴을 한 천박한 날림의 우리 시대 도동서원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도동서원은 명색이 보물이 아닌가. 원컨대 대구시와 달성군은 적절한 예산 집행과 제대로 된 공사감독을 통해 역사적 가치와 명성에 값하는 도동서원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해 본다. 도동서원은 대원군 시절 600여 개의 서원철폐령에도 끝내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인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이다. 지켜야 할 우리가 오히려 망쳐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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