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의 큰 어른 이경희 선생] 5부: 실력을 키워야 한다!<끝>

옥고도 막지 못한 독립혼, 출소후 신간회 창립 앞장

신간회 본부 임원.
신간회 본부 임원.
1927년 9월 3일 조양회관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대회가 개최됐다.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이경희 선생은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조양회관 모습.
1927년 9월 3일 조양회관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대회가 개최됐다.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이경희 선생은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조양회관 모습.
신간회 창립 총회.
신간회 창립 총회.
신간회대구지회 창립준비 신문기사.
신간회대구지회 창립준비 신문기사.

의열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뒤에도 이경희 선생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좌우 이념을 뛰어넘는 민족통일전선 형태인 신간회 창립에 적극적이었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자, 그해 6월부터 송두환, 최윤동 등과 신간회 지회 설립을 위해 몇 차례 예비모임을 갖기도 했다. 마침내 7월 23일 교남기독청년회관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치 준비회를 개최하고 이경희 선생을 비롯한 20여 명의 준비위원이 선정됐다. 준비위원 중 장적우, 김리룡, 장하명 등은 사회주의 계열에 속하고, 이경희 선생을 비롯한 나머지 대부분의 준비위원들은 민족주의 계열에 속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1927년 9월 3일 조양회관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대회가 개최됐다. 150여 명의 회원과 방청객 등 6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정'사복 경찰 20여 명의 삼엄한 경계 속에 열린 대회였다. 신간회 본부에서는 안재홍과 홍명희가 참석했고, 이경희 선생은 이날 신간회 대구지회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신간회 대구지회는 달성군 화원면과 옥포면에 화포분회를 설치하고, 대중 교양 및 의식 함양에 적극 나섰다. 또한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사상강좌회를 열어 학생층의 의식화와 조직화 활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대구고보에 적우동맹 등 학생비밀결사가 조직되었고, 1928년 대구지역 동맹휴교 투쟁의 기반이 됐다. 이경희 선생은 또 1929년 신간회 본부 보선에서 총무간사로 선출됐고, 그해 신간회 정기대회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경희 선생은 신간회 대구지회 제1회 정기대회(1927년 12월)에서 회장직을 부회장 최윤동에게 넘겨주고 일반회원으로 남았다. 김일수 교수는 이와 관련, 1927년 10월 16일 대구에서 조선경제연구회가 결성된 것에 주목한다. 신간회에 참여하지 않은 민족주의 우파 주도로 결성된 조선경제연구회는 '민중생활의 개선을 통한 경제의 발달'을 표방하며 김승묵, 최해종이 대표를 맡았고 이경희 선생도 참여했다.

그런데 조선경제연구회에 대한 대구지역의 여론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대구청년동맹은 '취지를 검토한 결과 운동선을 혼란시키는 반동단체 혹은 이류단체'로 규정했고, 반대 궐기문을 작성해 대구시내 각 사회단체 연합대책강구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신간회 대구지회도 조선경제연구회가 '신간회 권내의 사업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니 회가 성립되게 해달라'고 요청해온 것에 대해 '모든 민중이 단일당의 기치 밑에 모여드는 터인데 경제연구회란 것을 조직함은 상대적 혹은 반동적이니 양해할 필요가 없다'고 부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러한 조선경제연구회에 이경희 선생이 참여하게 된 것은 인간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경제연구회의 이선호와는 교남교육회에서 함께 활동한 경험이 있고, 이경희 선생 본인의 실력양성론적 입장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어쨌든 대구의 우익 세력들이 신간회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별도 조직화에 나선 조선경제연구회에 이경희 선생이 참여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경희 선생이 신간회 대구지회 회장직을 내려놓으면서, 신간회 대구지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대거 포진하게 된다.

이경희 선생은 또 1928년 백산상회 안희제와 당시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에 속한 서상일(동아일보 대구지국장) 등과 함께 재정난에 빠진 중외일보 회복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언론에 대한 이경희 선생의 관심은 생의 마지막을 남선경제신문(현 매일신문) 사장으로 마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 당시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이경희 선생은 서상일 등을 향해 "서상일은 자치주의자요 우경사상가이며, (중외일보) 발기 초에는 냉담하다가 1년간 피와 땀으로 설립한 기성기업을 계획적으로 횡령 탈취하려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결국 폐간된 중외일보는 1929년 재창간되었고, 그 후 4년 동안 안희제, 이우식 등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신간회 대구지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경희 선생은 신간회 본부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 당시 이경희 선생의 사회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있다.

1928년 11월 신간회 본부 총무간사로 활동할 당시, 밀양에 살고 있는 딸의 건강이 악화되어 병문안을 왔다. 그런데 밀양경찰서에 초비상이 걸렸다. '이경희가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를 지도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신간회 본부 총무간사가 딸 병문안 왔다가 지역 청년단체와 단순히 접촉한 사실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일제 경찰에 비상이 걸릴 만큼, 이경희 선생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1940년대 이경희 선생의 가족들이 고향의 산골로 숨어든 것도 바로 이런 감시와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의 눈을 피해 숨어든 이때에도 독립을 위한 노력과 희망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직후 이경희 선생의 활발한 활동은 이미 광복을 예상하고 준비해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참고자료]

지오 이경희의 생애와 독립운동, 김일수, 2016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공적비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위키백과 등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