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도망자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여러 식구가 비비고 살자니 당연히 서로 부대끼고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런대로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럭저럭 눈치껏 참고 지낼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 사람, 잡히면 바로 황천행이잖아"라며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그때마다 빈대같이 붙어 살아야 하는 자신한테 엄청난 환멸과 염증을 느꼈지만 당장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으니 애간장만 녹았다. 그날로 난 보따리를 꾸려 들고 미련 없이 그 집을 나와 버렸다.
갈 곳이 없었다. 세상은 넓으나 천지간에 내 한 몸 깃들일 곳이 없으니 방랑자 신세였다. 반겨줄 사람도 없고 친한 사람도 없었다. 살아있으므로 애면글면하는 고생이야, 내가 지구촌에 바치는 자릿세라고 여기면 그리 억울할 것도 없는 일이건만 절실할 때 내 바람막이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과, 세상의 비정함이 그렇게도 사무칠 수가 없어 창피한 줄도 모르고 걸으면서 울었다. 절박했던 세월의 앙금이 꺼이꺼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와 비감을 더하였다. 그러나 비관과 낙심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살아남으리란 욕망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하고 강했다. 갖은 수모를 견딜 수 있었던 인내심과 용기도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날 찾아간 곳이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 레스토랑이었다. 주인을 만나 전후 사정을 털어놓고 일을 좀 시켜달라고 호소한 결과, 너무나 쉽게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청소, 허드렛일, 심부름 등 거친 일은 도맡아 하면서 신임을 쌓았다. 마침 그 식당 종업원 가운데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 영화라는 아가씨와, 딸 하나를 둔 이혼녀 미다가 있었는데 그 둘은 나를 무척 따랐다. 나는 일도 열심히 했지만 종업원들에게 자상한 오빠나 혹은 직장 동료로서 매사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터라 두 여자와 상당히 친해졌다.
실인즉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절박하고 위급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동정심이나 기지를 발휘해 준 것은 여자들이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하루살이 같은 목숨, 언제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자구책이랄까 방편이 절실했었기에 딴에는 후일을 위한 하나의 투자랄까, 보험이라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일로써 그녀들을 도왔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장담할 수 없는 도망자 신세다 보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엔 악바리이가 돼 있었다.
하루는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왔다. 그날은 주인도 그들과 동석을 했는데 술을 마시다가 그만 "나도 탈북자 한 명을 돕고 있다"는 말을 해버렸다. 탈북자인 줄 알면 그들에게 잡혀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주인은 단순히 자랑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필경 화근이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잔뜩 조바심이 난 나는 식당 일이 모두 끝난 저녁, 내 방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도록 평소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가방을 미리 꺼내놓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불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촉각은 온통 바깥으로 향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날 저녁, 마당 한구석 가로등 옆으로 한 대의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와서 조용히 멈췄다. 동시에 내 속에서 '쾅' 하고 벼락 때리는 소리가 났다. 요동치는 심장과 다급한 마음은 당장 벽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 와중에도 일자리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바로 떨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쏘아놓은 화살이고 엎질러진 물이다. 창틈으로 연신 바깥 동정을 살피면서 버틸 만큼 버티다가 도저히 더 이상 안 되겠구나 싶은 순간, 한없는 아쉬움을 안은 채 그곳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어떤 이유로든 덜미를 잡혀 갈 수는 없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건너편 길을 향해 도망치다 마침 마주 오는 택시를 잡아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줄 것을 부탁했다. 충분히 사례하겠다는 내 말에 두말 않고 앞만 보고 달리던 기사가, 백미러를 힐끗 보더니 뒤에 검은 세단이 하나 따라붙었다고 해서 돌아본즉 대사관 차였다. 그 상태에서 쫓고 쫓기는 한판 추격전이 30분가량 벌어졌지만 결국 택시는 그들의 차를 멋지게 따돌리고 내가 원하는 장소에다 내려주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마음은 '갓방에 인두 달듯' 했지만 다행히 비상시를 대비한 도우미가 최소한 두 사람은 있다는 믿음이 상당한 위안이 돼주었다. 레스토랑 동료이던 영화와 미다를 말함인데, 그 두 여인은 함께 식당에서 일하는 동안 늘 내 편이 되어준 신뢰함 직한 우군들이었다. 전화를 했더니 마침 눈치 빠른 영화가 내 전화의 의미를 알아채고 선뜻 은신처를 제공하겠다고 나서주어 몇 달간은 그곳에서 급한 숨을 추스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신세만 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번에는 미다가 제의하는 그녀의 시골집으로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다. 미다의 다섯 식구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조건으로 일종의 계약 동거를 하게 된 셈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무슨 궁리인들 안 해본 것이 있었겠는가. 결국엔 상황버섯이 괜찮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채취했는데 운 좋게도 한국 사람들을 상대하는 상점 몇 곳을 주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항상 질이 좋은 상품만을 고집하는 한국인 구매자의 조건에 맞추기 위해 발품을 무척이나 팔고 다녔다. 그렇게 애쓰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거래 횟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그들로부터 사람이 진실하단 인정을 받게 돼 장사로 인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피할 수 있었다. 내 처지를 동정한 나머지, 그들은 대부분 물건값을 상품가치보다 더 후하게 쳐주면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성실과 정직을 신념으로 삼은 내 인간성에 돈으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동포애로 감싸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연명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닥치는 대로 해내었다, 특히 한국 사람의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거들었다. 간혹 현지 언어를 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어려움을 푸는 일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왔다.
어느 날 타슈켄트 내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운영하는 한방병원에 상황버섯을 팔러 갔다가 한국에서 파견된 그 병원 원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알고 처음 만난 그 앞에서 염치도 수치도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어쩐지 내 편이 되어줄 것만 같아 과거사를 진솔하게 털어놓고 애원했다. 그랬더니 너무나 선선히 그러겠노란 말과 함께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 오라는 약속까지 해주었다. 그 한마디에 난 온 세상을 얻은 것같이 들뜬 기분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행운이었다.
그 후로 원장님은 내가 가면 창고에 재고가 있건 없건 흔쾌히 버섯을 받아주었고 검문에 걸려 위기에 빠졌을 땐 만사를 제쳐놓고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구해 주었다. 하루는 갔더니 선물이라면서 핸드폰을 하나 내주었다.
"원장님 이렇게 비싼 물건을 왜 주시는 겁니까?" 당시엔 핸드폰이 대단히 비싸고 귀하던 시절이었다.
"자네, 지난번엔 내가 근무 중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연락이 안 됐으면 무슨 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겠나!" 그러니까 잘 간수하고 있다가 비상시엔 그걸 사용하라고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원장님을 친형님 대하듯 하게 되었고 사모님을 비롯한 병원 직원들까지도 항상 따뜻하고 인간적인 배려와 대접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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