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류호경 장애인 올림픽 사격팀 감독

"패럴림픽도 관심을…장애인 전체에게 용기·희망의 빛 될 것"

사진=이성근 객원기자
사진=이성근 객원기자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의 아들 딸 모두 어떤 조건하에서 태어날지 모른다고 하자. 잘살게 될지 못 살게 될지, 어떤 사고를 당해 어떤 장애를 가지게 될지 모른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가운데 내가 잘되고 네가 잘 못되면,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 서로 어떻게 해 주겠는가를 약속한다고 하자.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의 철학자 존 롤즈(John Rawls)는 이렇게 해서 맺는, 소위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속의 약속과 계약을 정의라 한다.

전체 인구 대비 등록 장애인구 비율이 5%, 15% 이상 되는 대부분의 OECD 국가들과 큰 차이가 난다. 장애인이 적어서가 아니다. 보호체계는 약하고 편견과 차별이 심해 스스로 장애인임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이다. 여전히 정의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이 시작되는 시점, 다소 무거운 느낌으로 장애인체육회 이천훈련원에서 류호경 장애인 올림픽 사격팀 감독을 만났다. 체육학 박사로 아시아장애인 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장이기도 하다.

군(軍) 생활 중 당한 뜻하지 않은 사고, 장애, 절망, 그리고 다시 찾은 희망, 그리고 장애인 모두를 위한 의지와 꿈 이야기를 들었다. 장애인과 장애인 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데, 또 정의로운 약속과 계약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김병준: 리우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패럴림픽'(Paralympic), 즉 장애인 올림픽도 바로 앞에 다가온 것 같다.

류호경: 9월 7일이 개막이다. 8월 30일 출국한다. 한국은 풀 쿼터, 즉 12장을 받았다. 그래서 12명이 출전한다. 여기에 스태프 6명, 모두 18명이 간다.

김병준: 일반 올림픽, 즉 비장애인 올림픽에 비해 관심이 낮다. 섭섭하지 않나?

류호경: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TV만 해도 비장애인 올림픽의 경우 몇 번씩 재방송까지 한다. 하지만 장애인 올림픽의 경우 그렇지가 않다. 몇 채널만이라도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

김병준: 오늘 이런 자리를 만든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류호경: 단순히 선수들 사기를 위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장애인들 전체에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 또 장애인들에게 체육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생활체육의 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

김병준: (류 감독과 동석한 박종철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훈련원 홍보부장에게) 장애인들의 생활체육 참여율은 어느 정도 되나?

박종철: 지난해의 경우 15.8%이다. 비장애인의 경우 참여율이 40% 정도 된다.

김병준: 참여율이 높아지는 만큼 우리 사회도 그만큼 밝아질 것이다. 장애인들 건강이 좋아지고 의료비가 줄어드는 것은 기본일 것이고.

박종철: 정부와 장애인체육회 등의 노력으로 많이 좋아지고 있기는 하다. 수년 내 20%까지 끌어올린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김병준: 군에 있을 때 다친 것으로 알고 있다.

류호경: 1987년 대학을 다니다 군대에 갔다. 원래 운동을 잘하는 편이라 전투체육도 많이 하고 군 내의 체육대회에도 많이 나갔다. 그러다 1988년, 씨름시합에 나가기 위해 연습을 하다 목이 부러졌다. 넘어지면서 머리가 먼저 닿은 것인데, 그걸로 하반신 불완전 마비가 되었다.

김병준: 엄청난 충격이었겠다.

류호경: 어떻게 말로 다 하겠나. 수술을 하고 7개월 병원생활을 했다.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다 그러겠지만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나…막막했다. 죽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김병준: 그 젊은 나이에.

류호경: 그러다 미국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활치료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영어는 중'고등학교 때 영어를 잘하는 외삼촌으로부터 배운 게 좀 있었다. 2년간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그걸 더 갈고닦았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미국에 갔다.

김병준: 미국 생활이 도움이 되었나?

류호경: 불과 8개월 정도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장애인에 대한 시선부터 달랐다. 장애인을 위한 제도나 편의시설이 너무 잘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나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대학원 입학허가서까지 받았지만 돌아와야 했다. 돈 때문이었다.

김병준: 그래서 돌아와 바로 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류호경: 아니다. 당시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취직이 급했는데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토플 성적도 굉장히 높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높은 벽이 있음을 실감했다. 할 수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 비디오 가게를 5년 하고, 대학 앞에서 당구장을 3년 했다.

김병준: 잘 안 된 모양이다. 결국은 운동을 하게 된 것을 보면.

류호경: 그것도 아니다. 장사를 잘했다. 돈도 잘 벌었고….(웃음). 그런데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몸이 더 나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수영을 시작했다. 다치기 전에 가장 잘하던 운동이라 그냥 했다.

김병준: 그렇게 시작해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가 되었다.

류호경: 사실 수영을 시작하고 나서야 장애인들도 전문 체육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전엔 장애인 올림픽 같은 대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어쨌든 알고 난 다음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남보다 못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장사하며 틈틈이 건강이나 유지하려고 한 것이 2000년 시드니 장애인 올림픽 수영선수로 나가는 데까지 발전했다.

김병준: 그냥 그렇게 되었겠나. 각고의 노력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은 수영이 아니라 사격이다.

류호경: 시드니 대회 성적이 좋지 않았다. 수영에서 꼴찌를 했다.(웃음) 귀국하는데 공항에서부터 대접이 달랐다.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만 관심이 쏟아졌다. 이왕 시작한 것, 메달을 딸 수 있는 종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격이다. 시드니에서 사격팀 바로 옆의 숙소를 쓰며 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게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하다.

김병준: 사격에서는 성적이 좋다.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류호경: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장애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201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메달 운이 좋았던 편이다. 하지만 개인전 금메달 운은 없었던 모양이다. 0.1점 차이로 세 번을 놓쳤다. 0.1점의 한이 있다.(웃음)

김병준: 단기간에,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나?

류호경: 사격은 지구력이다.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지만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공부도 몸을 쓰지 않지만 오래 하면 피곤해진다. 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다 호흡도 길어야 한다. 겨냥할 때는 숨을 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영을 했고, 그래서 호흡이 좋은 것 등이 도움이 된 것 같다.

김병준: 계속 청주시청 소속으로 되어 있다. 선수를 하다가 지금은 코치로 있고.

류호경: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장애인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후 거주지역인 청주의 시장께 인사를 갔다. 이 자리에서 장애인 체육의 의미와 장애인 체육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 등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당시의 한대수 시장께서 장애인 사격팀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이게 2004년 실제로 만들어졌다.

김병준: 계속 운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겠다.

류호경: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실업팀이다. 이것을 있게 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지금은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창단을 하고 있다. 대구광역시도 이 점에 있어 매우 적극적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김병준: (박종철 부장을 보고)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장애인 실업팀이 얼마나 되나?

박종철: 꽤 된다. 역도 펜싱 농구 배구 등 40여 팀이 된다. 청주가 최초이고 대구가 잘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민간기업인 무궁화전자도 장애인 농구팀을 만들었다.

류호경: 그래도 이런 부분은 지방자치단체 같은 공공기관이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한다. 일반 기업은 아무래도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다.

김병준: (다시 류 감독을 보며) 장애인 올림픽 감독이기도 하지만, 국제 장애인 스포츠 커뮤니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류호경: 아시아장애인올림픽위원회(APC) 선수위원장에 당선된 것 말인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웃음)

김병준: 주로 어떤 일을 하나?

류호경: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신장시키는 데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 선수위원들의 영어가 좀 달려서 그런지 그동안 집행부나 의무분과위원회 등에 비해 다소 소극적인 역할을 해 온 것 같다.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김병준: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류호경: 잘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웃음) 아시아권 영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아 고생을 하고 있다. 리듬과 억양 등이 정말 독특한 것 같다.

김병준: 체육학으로 박사학위도 받았다.

류호경: 사회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장애인은 더욱 그래야 할 것 같고…. 그래서 하게 되었다. 한국체육대학에서 했는데, 석사와 박사를 합쳐 꼬박 8년이 걸렸다.

김병준: 교수를 할 생각인가?

류호경: 강의를 좀 해 봤는데 그렇게 소질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나 자신이나 후배들을 위해 더 좋은 일 아닌가 생각한다.

김병준: 어떤 일을 한다는 말인가?

류호경: 아직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장애인 스포츠계에 들어온 이상 이쪽 후배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점차적으로 커가고 있는 기부문화를 이쪽과 연결시키는 문제 등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그렇게 하자면 나부터 메달도 더 많이 따고, 그래서 포상금도 많이 받아 더 많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웃음)

김병준: 결혼은? 아이는?

류호경: 결혼을 했고, 여섯 살짜리 아이가 있다.

김병준: 아빠의 장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류호경: "느림보 거북이." 우리 아이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다. 늦게 천천히 움직이니까.(웃음) 사실, 행여 나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늘 걱정을 한다. 나중에 청소년기에라도 말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아빠의 장애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미리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그게 교육인 것 같다.

김병준: 그런 걱정을 가지고도 부러울 정도로 표정이 밝다. 장애를 완전히 넘어선 것 같다.

류호경: 넘어선 게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수시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미스터리, 즉 알 수 없다. 현재는 영어로 프레전트(present), 즉 선물이다. 당신에게 온 선물,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김병준: 장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류호경: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김병준: 일부 언론에서 장애인들의 '롤-모델'이라 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단순히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생각과 행동 모두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류호경: 쑥스럽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는데 여기까지 왔다. 롤-모델 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뒤의 박종철 부장을 가리키며) 저기도 계시고.(웃음)

김병준: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빈다.

류호경: 사실 선수들 긴장이 다소 떨어져 걱정했는데 시합일이 다가오면서 다시 기록이 향상되고 있다. 예상보다 좋은 성적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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