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미가 품은 인물 꽃으로 피다] <2>주자학에 바탕 둔 모범적 유학자의 삶

"새 왕조에 불충 단죄" 서슬 퍼른 집행관 앞에 주저없이 목 내민 길재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 금오서원은 1572년(조선 선조 5년)에 길재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진 한태덕 사진 전문 프리랜서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 금오서원은 1572년(조선 선조 5년)에 길재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진 한태덕 사진 전문 프리랜서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야은 길재의 묘.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야은 길재의 묘.
야은 길재 초상화.
야은 길재 초상화.
금오서원 숙사인 동재. 금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존속한 4개 서원 중 하나이다.
금오서원 숙사인 동재. 금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존속한 4개 서원 중 하나이다.

금오산 대혈동의 대나무 숲에 창백한 달빛이 내렸다. 길재는 쉬이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지 않고 달빛에 젖은 대숲을 바라보았다.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짐하며 선죽교에서 죽어간 스승 정몽주의 넋이런가? 문을 걸어 잠그고 고려의 멸망을 애통해하며 죽어 간 두문동의 원혼이 달빛으로 찾아온 것일까? 그 빛은 서슬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었다. 참혹한 소식과 흉흉한 민심도 세월이 흘러 진정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건만, 정체 모를 불길한 마음은 온 밤을 잠들 수 없게 했다. 아침이 되자 평소에 자주 가던 대혈사의 주지 스님을 찾았다. 오후에 도선굴을 찾아 명상하고 집에 도착하니 칼을 찬 관리들이 들이닥쳤다. 한양에서 내려온 그들은 길재에게 칼날을 들이대었다. 새 왕조를 섬기지 않은 죄를 물어 목숨을 거둔다는 집행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금오산 현월봉을 울렸다. '어젯밤 달빛으로 내린 원혼들에게 이제는 떳떳할 수 있겠구나!' 생각한 길재는 주저 없이 목을 내밀었다. 금오산을 넘던 햇빛이 칼날에 반사되는가 싶더니 길재의 왼쪽 어깨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한편 이방원이 왕세자로 있을 때 정종에게 길재를 불러들여 태방박사의 벼슬을 줄 것을 건의했다. 태조 이성계의 낙점을 받아 왕위에 오른 정종은 실권자인 동생의 뜻에 따라 자신이 잘 모르는 길재에게 벼슬을 내렸다. 길재는 한양에 올라가 이방원에게 거절의 뜻을 전했다. 이에 이방원은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내린 것은 임금이니 임금께 사뢰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길재는 정종에게 '여자에게는 두 지아비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이성(二姓)을 섬기지 않았다는 지조를 지키고 노모를 봉양하다가 생애를 마치도록 해 주옵소서'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방원은 정종에 이어 조선의 3대 임금이 되었다. 피의 대가로 얻은 임금의 자리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난날 길재가 자신의 청을 거절한 그날을 곱씹으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왕권을 강화해야 했던 태종은 낙향한 길재에게 새 왕조를 섬기지 않은 죄를 묻고 싶었다. 또한 고려 왕조에 대한 그의 충절을 떠보려고 관리를 보내 그의 목을 베어오라고 지시했다. 길재가 순순히 목을 내밀면 귀 한쪽만 자르고 목을 움츠리면 목을 베라는 것이었다. 선산에서 올라온 집행관으로부터 소식을 보고받은 태종은 길재의 흔들리지 않는 충절에 감탄했다. 금오산 아래 채미정 경모각에 있는 길재의 초상화를 보면 약간 비스듬하게 앉아 왼쪽 귀가 보이지 않는다. 이 특이한 구도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는 해평 길씨 문중 사람들 사이에 야사(野史)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길재의 충절을 잘 나타낸다.

길재는 금오산 북서쪽 해발 약 480m의 사면에 있는 자연동굴에서 명상하거나 학문을 닦았다. 이 무렵 길재의 충절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은둔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 배움에 굶주린 이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길재는 애초에 홀로 공부하고자 했으나 단순히 글공부하려는 사람들부터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 강해를 들으려는 학자들까지 끊임없이 찾아왔다.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글을 가르쳤으며 학자들과도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그들 중 12세 어린 소년도 끼어 있었다. 선산이 고향인 소년은 강호 김숙자로 나중에 뛰어난 학자가 되면서 16세기 이후 정몽주와 길재로 비롯된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된다.

길재는 고려 사회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타락한 불가(佛家)와 무가(巫家)의 부패한 윤리관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리학의 가르침과 유교 방식을 몸소 실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부인 신씨와 함께 모든 상례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했으며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우왕이 살해되자 3년 동안 채과(菜果)와 해장을 먹지 아니하였으며 상복을 입고 마음을 다해 삼년상을 깍듯이 치렀다. 스승 권근이 별세하자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한 몸같이 생각하여 충성하며 효도하는 마음으로 삼년상을 치렀다. 어린 시절 첫 스승이었던 박분의 죽음도 슬퍼하며 삼년상복을 입었다. 이 새로운 윤리관은 바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윤리질서를 실천하는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안향, 백이정, 이제현 등을 거쳐 이색, 정몽주, 권근, 길재, 정도전 등에 의해 계승된다. 그 중 정몽주의 정통 성리학을 이은 길재와 김숙자-김종직 부자의 학풍이 크게 진작돼 조선 초기에 영남 사림파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구미'선산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말에 선산, 성주 등지의 사족들이 관료로 많이 진출하면서 다른 지역 출신의 사족들이 선산 지방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에 길재, 김숙자, 이맹전, 김맹성 등 성리학자들과 '불사이군'의 절의파, 세조의 등극을 반대하는 사류들도 선산으로 찾아들었다. 구미'선산을 성리학의 중심지로 간주하면서 '영남 인재의 반이 일선에서 났다'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길재의 나이 50세가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다. 뒤이어 장남 길사문이 죽어 아들의 상에 참쇠복(斬衰服)을 지어 입었다. 이양이라는 고을 군수가 길재의 형편이 곤궁하자 지금의 도량동 율리(밤실) 부근에 기름진 논밭을 마련해 주었다. "모든 것이 여유가 있으면 뜻을 끝까지 보존할 수 없다"며 하루 세 끼 연명할 정도만 남기고 되돌려 보냈다. 이 해에 경상도 관찰사 남재가 길재에게 가묘를 지어 드리고 좀 더 나은 거처를 마련해 줬다. 대혈동에서 살다가 지금의 선기동을 거쳐 도량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고전문학 연구가 이택영 씨는 대혈동에 살았다는 내용은 있지만,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대혈동에서만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량동 등 다른 장소로 옮겨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고도 말했다. 1418년에 태종 이방원이 길재의 절의를 존중하고 권장하기 위해 차남 길사순을 등용하고자 했다. 길재는 아들에게 "내가 고려를 잊지 못하는 마음을 본받아 너의 조선 임금을 섬긴다면 네 아비의 마음은 더 바랄 것이 없다"며 출사를 허락했다.

1419년, 길재의 병환이 깊어졌다. 신씨 부인이 아들 길사순을 부르려고 하자 "임금과 아비는 일체다. 이미 임금에게 가 있으니 부고를 듣고 오는 것이 옳으니라"하며 마지막까지 그다운 모습을 보였다. 왕조 사회에 순절은 위대한 미덕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순간적인 순절은 쉽고 목숨을 부지하여 절의를 지키기는 어렵다. 야은이 절의를 지키며 순절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에 바탕을 둔 위대한 사상 때문이었다. 금오산에 은거한 반평생 동안에 군사부일체의 윤리를 몸으로 실천한 길재는 유학자의 모범이 되었다. 절의에서 우러난 꼿꼿한 선비정신을 문인'제자들에게 가르침으로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던 그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길재가 세상을 하직한 이후 그를 기리는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길재의 사후 7년 뒤인 1426년(세종 8년)에 김성원이 길재를 좌사간대부에 추증할 것을 청해 받아들여졌다. 목은 이색의 후손인 이자(1480~1533)는 음성군에 유배되었을 때 거처하던 근처에 초은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포은, 목은, 야은 등을 초대한다'는 의미를 새겼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여헌 장현광도 길재를 흠모해 그의 효행과 충절에 대한 시와 글을 남겼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받는 이황 역시 길재의 절개에 대한 시를 남겨 그를 기렸다. 남인의 영수로 떠올랐던 미수 허목은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지만 두 사람 모두 길재를 숭상하고 기리는 데 열성적이었다. 조선 조정 역시 길재를 기려 영조 15년(1739년)에 충절공의 시호를 제수했으며 정조는 길재의 뛰어난 학문과 문장을 높이 사 1799년에 문절공의 시호를 내렸다.

구미'선산은 발길 닿는 곳마다 길재의 숨결이 느껴진다. 출생지인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는 길재가 어릴 적 놀던 남계천과 생가터를 나타내는 유허비가 있다. 금오산 중턱에는 길재가 명상을 하고 공부한 야은굴(도선굴)이 있다. 금오산 아래에는 백이와 숙제처럼 고사리를 캐 먹고살았던 것을 기리는 채미정이 있고 길재의 후학들이 학문을 논하던 공간인 구인재, 유허비각 등이 있다.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영조 44년)에 창건했고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에 감동한 숙종의 어필 오언구가 새겨져 있는 경모각과 비각이 나란히 서 있다. 고려가 망한 후 개경에 찾아 가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읊은 '회고가' 시비가 채미정 앞에 있다. 구미시 오태동에는 지주중류비와 길재의 묘소, 청풍재, 오산서원 터 등이 있다. 지주중류비는 '지주중류' 네 글자를 모사하여 세운 비로 '지주'는 중국의 황허 강 가운데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돌산으로, 흘러가는 물속에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길재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구미시 도량동 율리 마을에는 야은 사당과 재실도 있고 주변에 길재가 심은 '야은죽'이라 하는 대나무밭이 있다. 길재가 낙향해 살던 곳으로 이 동네에는 '야은초등학교'가 있고 '야은로'라는 명칭의 도로가 있다. 구미시 선산읍 원동의 남산 아래에 있는 금오서원에는 길재를 비롯하여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받은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을 배향하여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셔왔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