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새로운 만남
병원 직원 중에는 현지 사범대학 한국어과를 나온 '체르기자'란 우즈벡 출신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원장의 통역원이었는데 날 바라보는 시선이 유독 따뜻하고 그윽했다. 워낙 빈번하게 병원을 들락거리다 보니 체르기자와 교감이 통했던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제를 하게 되었고, 둘이 만나 식사를 하거나 휴일이면 함께 공원을 산책하는 등 좋은 감정이 자라났다. 12년이란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드러낼 수 없었던 내 안의 온갖 설움과 괴로움을, 마치 침몰하는 선박처럼 서서히 가라앉게 만든 힘은 내게 대한 그녀의 사랑이었다. 맘속에서 커가는 애정의 역학적 능동성은 상당한 자신감과 생기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원동력이었다. 온갖 어려움을 참고 들풀같이 질기게 견뎌 온 지난 세월이 한꺼번에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결혼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게 되었다.
일이 풀리려 드니까 2005년도에는 드디어 UN 난민 지위 자격까지 얻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힘써주신 김 원장님 노력의 산물이었다. 덕분에 난민 증명서까지 받고 난 후로는 경찰서 앞을 지나가도 더 이상 무섭긴커녕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졌다. 도둑처럼 숨어다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대단한 격세지감이었다.
그동안 북에 두고 온 처자식은 언제나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앙금 같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지만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산마을로 찾아오는 먼 데 저녁 종소리처럼, 한 번씩 문득문득 잠자던 그리움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면 몸부림이 날 만치 집에 가고 싶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과 마음, 무디고 누추해진 감정 어디에 그런 에너지가 숨어 있는 것인지 그때마다 하염없는 통한에 울었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이기에 체념하고 포기한 지 오랜 상태이면서도 몸이 아플 때는 유독, 잠겼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부표처럼 가슴 언저리로 떠오르는 오만 가지 상념으로 서러웠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가 있는 돌투성이 동네 고샅길이며, 군데군데 허물어진 우리 집 흙 담장까지, 어느 것 하나 그리움 아닌 것이 없었다.
세상살이 변하고 나도 많이 변하였건만 도리어 틈만 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그리움…. 어쩌면 그러기에 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잊고 살 수 있는 해방구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나 모르겠다.
체르기자와의 결혼 문제가 구체적으로 대두되자 북쪽 아내에 대한 예의로라도 고백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체르기자를 위해서도 한 번쯤은 반드시 밝히고 넘어가야 할 도덕적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내친김에 그간의 세 여자에 대한 과거사까지 모두 다 털어놓은 다음, 판단은 체르기자의 몫이라 믿고 침착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대답이 어떻게 나오더라도 전적으로 그녀의 뜻에 따를 작정이었고 마음으로 각오도 단단히 한 상태였다. 한데 그녀의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은 살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허랑한 치기가 아니었잖습니까.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 됨됨이인데, 그 문제라면 지금까지 지켜본 것으로도 충분한 걸요." 체르기자의 답변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난 이미 당신을 내 인생의 동반자로 결정했어요."
세상에 다이아몬드같이 귀한 존재가 나를 배우자로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흡사 어머니같이 내 아픔과 고민을 어루만져줄 줄 아는 속 깊은 연인이었다. 천하에 집도 절도 없이 쫓기면서 살아온 나에게 따뜻하기는 모닥불이요, 깊기로는 우물 같은 애정이고, 포용력이라면 감싸 안는 태도가 커다란 이불 같은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난 말할 수 없이 고무되고 기뻤다. 그녀의 사랑은 내 인생은 물론 나 자신을 구제하고 재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셈이다.
결혼 문제를 앞두고 내심 염려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난 이미 오래전에 무리를 잃어버린 기러기 신세인 데다 나이까지 많다 보니 나에 대한 그녀 부모님의 반응이 엄청 신경 쓰이고 염려스러웠다. 도무지 근본을 알 수 없는 녀석이 결혼하겠다고 나선다면 선뜻 그러라고 허락해 주실까, 그 생각만 하면 걱정 근심이 태산이었다.
그러한 우려는 당장 현실로 나타났다. 돈도 없지, 신분도 불분명하지, 반대는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느닷없이 패대기쳐진 것 같은 마음은 더없이 쓸쓸하였다. 자유를 얻어 이제부턴 잘 살 일만 남았다고 좋아했는데 그 기쁨도 잠시뿐, 결혼 문제가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자 희망도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고 허탈하였다. 내 일을 나와 같이 진정으로 반기고 기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과연 내가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나 있을는지, 갑자기 전등이 탁 꺼져버린 듯 속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난관에 대처하는 용기와 의지는 체르기자도 나 못지않게 강한 여자였다. 워낙 확고부동한 그녀의 결심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사실로 증명해 보였다. 종당에는 당신들의 고집을 접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우리는 2008년 가을. 마침내 타슈켄트 시내의 한 카페에서 지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조촐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비로소 나도 기본적인 틀을 갖춘 생활인이 된 것이다.
그 후 얼마 뒤에 김 원장님 주선으로 UN을 통한 제3국 희망 신청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으로 귀화하자는 데 일고의 갈등 없이 우리는 뜻을 같이했다. 대학 전공이 한국어인 체르기자는 나 못지않게 좋아라 반겼다. 가보기도 전에 이미 소문으로 익숙해 있었던 나라. 내 절반의 조국에 대해선 걱정 반, 기대 반인 채로 마치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우린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날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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