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주간신문의 역사는 전체 신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주보'(漢城周報)는 일주일 단위로 발행하는 주간신문이었다.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도 처음엔 격일간 주 3회 발행하다 1주일 간격으로 발행 시스템을 바꿨다. 우리나라 초기 신문의 형태는 주간신문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일간지로 변신한 신문을 대신해 잡지 형태의 주간지가 주간신문의 자리를 차지한다. 주간지는 연예, 대중문화, 시사 등 다양한 전문분야를 테마로 다루면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와 함께 지방자치제도의 등장으로 각 해당 지역과 밀착한 지역 주간신문이 우리나라 주간신문의 역사를 양분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이하 순보)와 '한성주보'(이하 주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돼 열흘마다 발행되다가 이듬해 12월 4일의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주보'는 1886년 1월 25일에 창간된 이후 1주일 단위로 발행되다가 1888년 7월경 폐간됐다. 그러므로 순보를 계승한 신문이 주보이긴 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신문은 한성주보였다고 할 수 있다.
순보와 주보는 '국민들에게 세계정세를 알리는 한편 선진 국가의 정치'경제 및 문화 제도를 소개하고, 과학지식을 보급시켜 결국은 이 나라를 문명개화의 단계로 이끌어 보려는 목적'에서 조선 정부가 창간한 관보 형태를 띠었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발간된 신문은 근세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문 발간을 처음 준비한 사람은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돌아온 박영효였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된 박영효는 약 3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정계 지도자와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본 후에 1883년 1월 6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한 박영효는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에 임명돼 신문 발간 준비에 착수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선진 외국의 문물을 소개하고 정부의 시정방침과 각 지방의 장계, 관리들의 임면, 물가동향 등을 폭넓게 알렸던 한성주보의 발행부 수는 의외로 많았다. 매호 3천 부 정도는 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도 주간신문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면서 순한글 신문이다. 갑신정변에 가담한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95년 귀국한 서재필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일하면서 만든 신문이다.
창간 당시 가로 22㎝, 세로 33㎝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제작됐던 독립신문은 전체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해 격일간 주 3회 발행했다. 이후 독립신문은 1899년부터 1주일 간격으로 발행하는 주간신문으로 변신한다.
독립신문은 개화기 한국 국민들에게 우리나라의 위치와 국민의 권리'의무를 일깨워준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 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언론계는 1957년부터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의 부패와 러시아의 이권 침탈에 비판 논조를 보였던 독립신문에 대해 정부가 사옥을 회수했고, 친러 수구파들이 탄압을 가하면서 1899년 12월 4일 종간되고 말았다. 창간한 지 꼭 3년 8개월 만이다.
독립신문은 창간사에서 사명을 '독립사상 고취와 민심통일, 독립사업과 사상 전파,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 제시, 새로운 학술과 새로운 사상 소개, 국사와 국민성을 고취 개조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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