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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주간매일, 33년을 돌아보다(상)] 창간 진두지휘 이정훈 당시 편집국장

이정훈 전 매일신문 편집국장이 본사 정보관리부에서 주간매일 지난 호들을 보며 창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이정훈 전 매일신문 편집국장이 본사 정보관리부에서 주간매일 지난 호들을 보며 창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정보의 홍수…매일신문 '주간매일'을 창간하다

주간매일 탄생은 정부의 신문 발행지면 규제 정책의 공로(?)가 컸다. 당시 12면으론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기사를 소화하기에 부족한 상태였다. 심층보도와 해설기사는 엄두도 못 낼 상황. 이정훈 전 매일신문 편집국장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1980년대 경제호황을 업고 우리 사회는 본격적으로 정보화, 대중화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생활정보, 가계 뉴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콘텐츠들을 담아낼 그릇이 없었습니다. 증면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지만 정부 규제에 묶여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1980년대 초반은 언론사적인 측면에서 격변의 시대였고 의미 있는 변화가 싹트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5공 정권하에서 민주화 담론이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3저 호황을 업고 신문광고의 수요가 넘쳤습니다. 또 생활정보, 대중문화에 대한 사회적 욕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발행지면을 12면으로 묶어 놓았어요. 콘텐츠의 홍수, 정보의 동맥경화 속에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요구를 업고 '매일생활정보'(주간매일 전신)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생활정보 수요 급증=역설적으로 주간매일의 탄생은 정부의 신문 발행지면 규제 정책의 공로(?)가 컸다. 당시 12면으론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기사를 소화하기에도 부족한 상태였다. 심층보도와 해설기사는 엄두도 못 낼 상황.

이정훈 전 매일신문 편집국장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1980년대 경제호황을 업고 우리 사회는 본격적으로 정보화, 대중화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생활정보, 가계 뉴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콘텐츠들을 담아낼 그릇이 없었습니다. 증면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지만 정부 규제에 묶여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주간매일 창간 전사적으로 매달려=주간매일의 탄생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 그 당시 해외연수를 다녀온 일선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독일, 영국, 미국 등에서 공부하며 '타운 페이퍼'(Town paper)를 접하고 그 필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했다. 이들이 귀국 때 챙겨온 현지 신문들은 창간 작업 때 좋은 교재로 쓰였다.

창간 계획이 확정되자 회사는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전달출 전 사장님이 일선에서 인허가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셨고 제가 총괄, 기획을 했습니다. 광고국에도 별도로 주간매일을 위한 영업부서가 꾸려졌습니다. 실무, 제작, 편집은 당시 아이디어통이었던 김정길(현 TBC 사장) 차장이 전담했습니다." 이런 산고 끝에 1983년 8월 20일 창간호가 햇빛을 보게 되었다.

◇5공 초기 '언론법' 규제 뚫고 창간

언론에 대한 규제와 탄압이 정점을 찍었던 5공 초기, 매일신문은 어떻게 서슬 퍼런 규제를 뚫고 주간매일을 창간할 수 있었을까. 전국 최초 주간지 창간으로 가는 길, 첫 번째 장애물은 '일간 신문사는 주간지를 발행할 수 없다'는 언론기본법이었다.

이에 회사 경영진은 일체의 '신문' '주간' 같은 명칭을 붙이지 않고 순수하게 생활정보만 싣는다는 조건으로 인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일단 주간지로 안착을 하자 얼마 후 언론자유화 바람이 불었고 규제도 완화되었다. 이런 변화의 바람을 업고 '생활정보'는 '위클리 매일' '라이프매일' '주간매일'로 제호 변경을 통해 생활정보에서 본격 주간 언론 매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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