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경주의 시와 함께] 실패한 산책

강정(1971~ )

혼자 걷는 천변이 너무 고요해

해만 동그렇게 입 벌리고 있어

그 입에서 나온 말을 길 위에 그려 보려고,

그 입에서 터진 소리를 울려 귓속 동굴을 꺼내 보려고,

해의 심지를 부추겨 세상을 태워 보려고,

햇빛을 백색 가루처럼 뒤집어쓴 너는 말끝이 자꾸 불꽃되어

지워지는 시를 썼다

중략

나는 네가 되기 위해 말할 뿐,

내가 나를 말하기엔 나는 나를 이미 모른다

머리에 뿔을 달고 혼자 떠도는 저녁 모퉁이

중략

같이 걷다가 내 일은 겁이 많은 누군가의 옆을 지키는 일이 되었다. 그 사람의 부스러기를 사랑하는 거, 생활이 된다는 건 함께 세상에 겁을 먹어주는 일이다. 그런 일은 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가 되기도 했고, 반들반들해진 면바지의 농도가 되기도 했다. 같이 걷다가 가까이서 서로의 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거, 당신의 망가진 깊은 곳에 눈송이를 들여보내는 일,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적이 드문 당신을 사랑하기로 하는 일, 백치만 할 수 있는 일, 이 세상에 손을 집어 넣어 인적이 드문 당신을 사랑하기로 하는 일,

"나는 네가 되기 위해 말할 뿐" 서로의 겁을 들여다 보는 사이 산책은 실패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