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재난과 참사에 우리 사회는 원인을 꼼꼼히 파헤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미흡했다. 결론은 언제나 경제논리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경제가 우선이니 그만 덮자." 자본주의는 본질상 성장을 목표로 하는 시스템이어서 누군가의 눈물을 싫어한다. 늘 밝고 희망차게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모습을 선호한다. 그리하여 애도는 실종되고 트라우마는 남아서 유령처럼 이 사회를 맴돈다. 예술, 그리고 영화가 포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예술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란 소수자를 둘러보고, 망각된 역사를 복원하며, 애도되지 못한 트라우마를 보듬는 것이다.
최근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넘어서며 한국 재난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 뒤를 '터널'이 잇는다. '터널'은 자연스레 최근 한국사회를 뒤덮었던 재난으로 인한 집단적 상처를 건드린다. 거기에는 우연히 피해자가 된 인물, 이를 해결해야 할 국가의 무능, 직업윤리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직업인들의 위선, 잘못도 없이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피해자 가족, 미디어 선정주의가 불러오는 더 큰 참사. 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 고개를 끄덕거리게 한다.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안에는 소시민의 연대와 희생정신,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 데서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 불굴의 의지, 고난 앞에 좌절하지 않는 진정한 영웅이 있다.
자동차 판매원 정수(하정우)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하도터널 붕괴로 매몰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터널이 붕괴되고, 이야기는 대부분 캄캄한 터널 안에서 진행된다. 의식을 찾은 정수는 자신이 터널 안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에 깔렸음을 알게 된다. 구조대책본부 김대경(오달수) 대장의 노력과 아내 세현(배두나)의 무사 염원에도 불구하고 매몰된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구조가 지지부진해지면서 구조 작업을 둘러싼 여론이 분열된다. 완공에 차질을 빚고 있는 인근 제2터널 공사의 재개를 위해서도 구조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데뷔작인 '끝까지 간다'(2014)의 김성훈 감독은 끝까지 긴박감 있게 몰아치는 자신의 개성적인 연출 스타일을 이 영화에서도 제대로 발휘한다. 터널 안에서 대부분 이루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긴박감이 넘친다. 하정우의 변화무쌍한 감정 연기가 단순한 배경임에도 긴장감을 놓지 않는 요인인데, 이는 하정우가 역시 주연을 맡았던 '더 테러 라이브'(2013)를 떠올리게 한다.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면서 영화 전체를 책임지는, 엄청난 역량을 보여준다. 터널 밖은 여러 사람들이 몰려 우왕좌왕하고, 터널 안에 홀로 살아남은 정수는 절망과 희망을 오가며 외로움과 싸우면서 수십 일을 버틴다. 터널 안과 밖의 대조적인 상황에서 두 공간을 연결하는 것은 오로지 휴대전화뿐이다.
김성훈 감독은 "인간의 생명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인데, 희생자의 수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한 사람이 거대한 재난을 홀로 마주했을 때 외로움이나 두려움은 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기자간담회에서 말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단 한 명 홀로 남은 희생자가 살아남기까지 그가 이겨내야 했던 것은 음식과 부상뿐만 아니라 외로움이다. 단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다.
최근 몇 년간 많은 가슴 아픈 사건들을 거치며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부실공사로 참사는 예고되어 있고, 사람보다는 특종이 먼저인 언론은 기자 윤리를 왜곡하고 있으며, 너무 바쁜 정치인들은 하나 마나 한 지시나 내리며 사진 찍기에 공을 들인다. 이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영화는 이 처참한 참사를 심각하게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삶에도 가끔씩 유머와 이완의 순간이 있다. 그래야 더 길게 생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블랙코미디와 재난물이 복합된 이 영화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불안한 사회라는 섬뜩한 메시지를 던진다. 제도의 허점과 원인을 짚고 있으면서도 풍자 정신을 잃지 않고, 스피디한 긴박감이 넘치는 잘 만들어진 재난영화다. 더불어 인간과 동행하는 귀여운 생명체 역시 이 땅의 주인이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함을 섬세하게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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