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주년, 우리 민족을 일제의 억압에서 구해내는 바탕이 됐던 자랑스러운 대구경북 독립운동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발견됐다. 이런 가운데 대구경북 독립운동사를 간직한 소중한 유적이 이제 잡초 더미에서 벗어나 복원된다는 낭보도 날아들었다.
◆발견…"복국의 공신이 되시라" 석주 선생 부인의 내방가사 첫 선
'백수 노인 우리 주군 만세 만세 만만세야. 이름이 하늘을 덮고 만인지상(萬人之上) 되시며 복국(復國)의 공신(功臣)이 되셔서 천만세 무궁하도록 만대(萬代)의 영웅이 되지어라. 용호(龍虎)와 같은 자식들아 나태(懶怠)한 마음 먹지 말고 부모에게 영효(榮孝)하라.'
아흔아홉 칸 대저택을 버리고 모든 가족을 인솔,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는 남편을 향해 쏟아낸 말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부인인 김우락(1854∼1933) 여사가 이 글의 주인공이다. 원망과 한탄은커녕 독립운동에 대한 끝없는 찬사를 쏟아냈다.
만주 독립운동과 항일 과정을 적은 김우락 여사의 내방가사가 발견됐다. 석주 선생의 후손인 이재업 사단법인 유교문화보존회장이 수집'보존해오던 문중 관련 여러 문적(文籍)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방가사를 찾아낸 것.
이 내방가사는 그동안 왕산 허위 선생의 손녀로 석주 선생의 손부인 허은 여사의 필적으로 알려져 왔지만 한국국학진흥원 천명희 국문학 박사 등 연구진들에 의해 김우락 여사의 필적으로 밝혀졌다. 광복 71주년의 의미를 더욱 키우고 있다.
김우락 여사는 임하면 천전리 의성 김씨 청계공(靑溪公)의 차남 귀봉(龜峯) 김진린(金鎭麟) 선생 딸로 태어났다. 오빠 김대락 선생은 석주 선생과 더불어 안동 유림을 대표했고, 여동생 김락(金洛) 여사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의 며느리로 안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 가문을 이뤘다.
김 여사의 내방가사는 세로 29㎝, 가로 7m가량의 두루마리 형태로, 각행은 10~12자가량의 단아한 여성의 필체로 돼 있다.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로 추정되는 이 가사는 석주 선생이 일족을 이끌고 신해년(1911년)에 서간도로 망명했을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적혀 있고, 당시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의 정착을 방해해 석주 일가가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던 과정도 잘 드러나 있다. 가사의 창작시기는 망명한 신해년 가을 유하현(柳河縣) 영춘원(永春源)에 정착한 직후로 추정된다.
'구담주점 다다르니 손셔의 화월지용 계와셔 긔다리네' '츄풍영 너머갈졔 슈족갓흔 우리하인' '종일을 차를 타고 경셩남문 나려셔니' '셔울셔 밤ㅅㆎ우고 남문밧 졍거쟝의 나가려니' '져근덧 신의쥬라 나가려니' '먼져오신 우리쥬군 계와셔 긔다리네' '일쥬야를 계셔 쉬고 압녹강을 건너셔니' 등의 문구로 봐서 '안동 구담→추풍령→경성→신의주→단동'이라는 상세한 망명 경로가 드러난다. 경술년 국치로 나라를 빼앗기고 이듬해 만주로 향했던 석주 선생 일가의 망명 경로와 영춘원 정착 과정이 자세하게 담겨 있는 만큼 사료적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달픈 만주 생활도 담고 있다. 회인현 향도촌에 머무르다 이회영'이동녕 선생 일가가 있던 유하현 삼원포로 가지 못하고 청나라 사람에게 쫓겨 통화현 두릉구와 영춘원을 거친 뒤 유하현 대우구에 정착하게 된 사연도 적혀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천명희 박사는 "당시 여성들이 소극적인 시대정신을 보인 것과는 달리 종부의 기개가 느껴진다"며 "김우락 여사의 내방가사로 '간운사'(看雲詞)와 '조손별서'(祖孫別書)가 전해지지만 이번에 발견된 '해도교거사'가 가장 앞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재업 유교문화보존회장은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나라를 잃어버린 통한과 분노를 달래며 독립의 염원으로 모진 고난을 감내하던 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방가사"라고 평가했다.
안동 엄재진 기자 2000jin@msnet.co.kr
◆복원…이육사의 영천 백학학원 내년말 완전체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자 일제강점기 민족교육기관이었지만 잡초 더미 속에서 폐허로 방치돼왔던 영천 백학학원이 본격 복원된다.
학교법인 산동학원은 영천 화남면 안천리 백학학원의 개'보수를 위해 설계에 들어갔다고 14일 밝혔다. 10월까지 설계를 끝내고 11월쯤 착공해 내년 말 완공할 예정이다. 개'보수지만 건물이 허물어져 사실상 복원에 가깝다. 총사업비는 국비 1억6천800만원, 경북도비 1억2천만원, 영천시비 2억7천200만원 등 5억6천만원이다.
백학학원 복원은 4, 5년 전부터 추진됐지만 국비를 확보하지 못해 사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백학학원은 2013년 2월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복원 비용은 마련되지 못했던 것.
하지만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전 국회의원이 지난해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장에서 백학학원 방치를 강하게 질타한 뒤 국비가 마침내 반영됐다.
백학학원은 백학서당이었다가 1921년 새로이 신학문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영천의 유지 조병건 선생이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창녕 조씨 문중과 지역민의 협조를 얻어 개교했다.
이곳은 저항시인 이육사,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한 조재만, 조선의용대 간부로 항일무장투쟁을 한 이원대,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서 활동한 이진영, 일본에서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선 조병화, 의열단 간부학교 대원 모집 활동을 한 안병철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육사는 12∼15세 때 안동 보문의숙에서 수학하고 17세 때인 1921년 영천 화북면 오동리 대지주 안용락의 딸 일양과 결혼하면서 백학학원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처가 근처 백학학원 보습과(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특별반)에 다니며 독립운동가 조재만과 처남이자 독립운동가인 안병철과 교유했다. 이육사의 장인 안용락은 백학학원의 학무위원이었다.
이육사와 조재만은 백학학원 교사였던 서만달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이후 항일 독립투쟁의 동지가 됐다.
백학학원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 한옥이었지만 현재 대청 2칸, 온돌방 1칸 등 3칸만 남아 있다. 왼쪽 온돌방 1칸과 양 측면 가적지붕(본채 옆 작은 지붕) 아래 2칸은 무너져 사라졌다. 문짝과 대청마루는 모두 뜯겨나갔으며 벽체도 파손됐다. 잡초가 무성해 들어가기도 어려울 정도다. 서까래도 썩어 있다.
조인호 영천전자고 교장은 "이육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의식 및 항일의식 형성은 백학학원의 민족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백학학원을 민족의식 고취 및 항일 독립운동 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마련하고 문화재 신청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백학서당은 1555년 신녕현감 황준량과 유림들에 의해 영천 화산면 백학산 아래에 건립됐다. 당시 퇴계 이황 선생이 '백학서당'이라 이름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12년 중건됐으며 1658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1678년 서원으로 승격돼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황준량을 배향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00년 서당으로 복건됐다.
영천 민병곤 기자 minb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