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시와 인생에 대한 아홉 개의 짧은 생각

김수상
김수상

청춘의 어느 때, 대구백화점 뒷골목 술집에서 친구가 자기 애인의 토사물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내는 풍경을 본 적이 있다. 시인이 언어를 대하는 태도도 그러해야 한다.

시는 언어를 비틀어서 조합하는 자리에서 탄생한다. 언어를 비튼다는 것은 인식을 비트는 일이다. 인식을 비틀지 않고서 새로운 삶은 얻어지지 않는다. 시에 이르는 길은 새로운 삶에 이르는 길이다. 언어를 통하여 존재를 날것으로 포획하려는 시인의 이기심이야말로 시의 동력이다. 시인은 언어에 대해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다.

하나의 말을 드러낸다는 것은 수천억만 개의 말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언어의 개진(開陳)은 곧 언어의 살해다.

옛날, 조부님을 따라 서커스단의 공중그네 타기를 본 적 있다. 남자가 높은 곳의 줄에 매달려 여자를 던지면 여자가 손을 놓고 회전을 한다. 여자가 손을 놓은 것은 남자가 자기의 손을 다시 잡아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던져진 언어를 다시 잡아줄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의 시는 지금 공중에 버려진 여자다. 생사(生死)의 경계에 버려진 서커스 곡마단의 여자.

좋은 시는 변죽만 쳐도 복판이 운다는데, 그것도 좋지만 복판을 쳐서 변죽을 잘 울리는 것도 좋은 시일 것 같다.

어린아이가 달리다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지면, 상처 난 옆의 살을 꼬집는다. 아픔을 잊으려고 새 아픔을 만드는 것이다. 상처를 잊으려고 새 상처를 만드는 것이다. 사는 일이 그것과 똑같다.

사랑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사랑에 대한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사랑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곧 사랑을 바꾸는 것이다. 마누라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마누라에 대한 태도는 바꿀 수 있다. 마누라의 자리에 남편, 자식, 원수, 마침내 인생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텔레비전에서 강의를 한다.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취업을 안 하거나 구매를 안 하면 된단다. 불면증을 없애려면 정신과와 불면증 약을 없애면 된다는 얘기로 들렸다. 경박한 강의는 항상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꽃밭에서 꽃이 꽃을 피우는 일은 꽃의 일이기도 하지만 밭의 일이기도 하다. 꽃이 병을 앓는 것은 꽃만의 잘못이 아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