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숫자의 함정

토론을 하거나 글을 쓸 때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서 이야기를 하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고, 주장에 믿음이 간다. 그냥 막연히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경기가 안 좋아진 것 같다"라고 하면 매우 편협한 데서 근거를 가져왔으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준다. 대신 "지난 분기 대비 경제성장률이 1.2%포인트 떨어졌으며, 경기 선행지수도 90으로 3분기 연속 하락했다"라고 말하면 굉장히 전문적으로 보이면서 경제가 얼마만큼 안 좋아졌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국어 화법이나 작문 시험에서 지문의 표현 특징을 묻는 문제에서 "구체적 수치를 사용하여 신뢰성을 확보하고 있다"라는 답지를 많이 사용한다. 이런 문제에서 학생들에게 풀이 요령을 가르칠 때는 구체적 수치를 사용하면 당연히 신뢰성이 확보되는 것이니까 지문에서 구체적 수치가 나와 있는가만 확인해 보라고 한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구체적 수치를 사용하면 신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수치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그냥 느낌으로 이야기하는 두루뭉술한 말보다 매우 명쾌하고, 세상의 일을 아주 투명하게 왜곡 없이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선입견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2009년 1만7천달러에서 작년 기준 2만6천달러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살림살이도 그만큼 많이 나아져야 할 텐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체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거리감이 생기는 이유는 1인당 GDP라는 것이 1인이 평균적으로 버는 소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국민들과 법인들이 생산한 것을 인구 수로 나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뮤다같이 유령회사들이 많은 나라의 경우 1인당 GDP는 8만5천700달러나 되지만 살아가는 수준은 근처에 있는 가난한 나라들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 일본의 경우 GDP가 정부 방식과 중앙은행 방식이 달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부 치적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실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그 안의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단순히 수치만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의 일을 왜곡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일전에 교사의 77%가 대학 입시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의 확대에 찬성한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었고, 이를 근거로 한 사설이나 칼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수치는 학생부종합전형을 연구하는 교사들의 포럼에서 참석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자료는 아니다. 최근에는 이와는 다른 설문 결과 수치들도 나오고 있는데, 그 수치들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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