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 대한민국
2009년 초가을. KAL 항공기 편으로 그동안 그리기만 했던 희망의 신천지, 한국에 왔다. 도착한 다음엔 '국정원'에서 기본적인 조사를 받았고, 그다음엔 정착을 위해 현지 적응에 필요한 교육을 '하나원'에서 받았다. 마치 장님한테 지팡이를 쥐여주듯, 하나같이 실생활에 유익한 프로그램들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사회 체험 프로그램에서 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대단히 신선한 경험이었는데,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그렇게 큰 화면으로 영화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람이 밖으로 툭 튀어나올 것같이 사실적인 장면들은 굉장히 신기하였다.
그다음 한 가지는 애국가를 배울 때였다. 4절 시작 첫 소절에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에서부터 후렴 부분인 '대한 사람, 대한으로'라는 대목에서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하였다. 나도 이젠 대한민국 구성원이란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같다. 아~ 이 새로운 땅에서 한번 멋들어지게 잘 살아보리라는 각오가 뭉실뭉실 솟아올랐다.
한국에 올 무렵, 체르기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그리고 하나원을 나온 지 얼마 후에 아기를 낳았다. 출산 다음 날 출생신고를 하려고 동사무소엘 갔다가 아내인 체르기자가 혼외 동거인으로 올라 있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내가 동거인으로 등재된 사실도 당혹스러웠지만 갓난 아기가 사생아가 될 상황은 더욱 기가 찼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했지만 까닭인즉, 새터민 호적을 만들 당시 내가 신고한 사항 때문에 빚어진 오류였다. 그것을 정정하려면 구두(口頭)로는 안 되고 법원에다 정식으로 호적 정정 절차를 밟아야 할 판이었다. 새 호적은 현재의 상황을 위주로 기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단순함에서 생긴 시행착오였으므로 가슴을 칠 일이었지만, '봉사가 제 눈먼 탓'이나 해야지 개울 탓을 할 개재가 못 되는 사안이라 우선 아기 출생신고부터 해 놓고 돌아왔다.
인생이란 산맥은 자기 운영 여하에 따라 무난하게 넘어갈 수도 있고, 혹은 진땀을 뺄 수도 있는 것이지만, 냉엄한 현실이 새삼스레 낯설고 더럭 겁이 났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까.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고. 어디 한 사람 의지할 데가 있어야 찾아가서 의논도 할 텐데, 그럴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은 내가 새터민임을 새삼 자각하게 만들어 외로웠다. 살다 보면 언제 또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찌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애수를 느꼈다.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려면 사회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체계적인 기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새터민의 입장에선 근본적인 인프라 구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삶 가운데서 문화적, 정서적 차이에서 오는 이런저런 문제들과 만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난제(難題)도 잦다 보면 해법을 찾는 데 이골이 나게 마련이고,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엔들 삶의 동통이 없을까.
이(齒)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고, 형편이 돌아가면 의치(義齒)도 해 끼울 수가 있는 것을….
뜬금없이 불거진 호적 문제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친 다음 날, 아침 일찍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런 문제가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상담 변호사의 말대로라면 같은 케이스가 한둘이 아니었다.
"비슷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답이 없는 문제가 아니니까 희망을 가집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에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동류의식이 걱정을 완화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위안이 돼주었다.
"O경칠 씨, 우리도 한번 해 봅시다."
그 한마디에 어찌나 힘이 나던지 천군만마를 얻으면 그런 기분일까. 믿고 맡기라는 말을 듣고 사무실을 나서면서 그래, 기다리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하지, 느긋함까지 생겼다. 전문 변호사의 말 한마디가 그 메가(Megabyte)급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11. 에필로그
포도주에는 산지(産地)의 향기가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태생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지 워낙에 깡마르고 검게 그을리다 보니 누구한테도 호감을 사지 못하는 모양새가 은근히 불만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아마도 이젠 외모에도 신경이 쓰일 만치 여유가 생긴 모양이지만, 평안도식 강한 억양은 주머니 속에 든 송곳만큼이나 감추기가 어려워서 대개의 서울 사람들은 내가 탈북인이란 사실을 알고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다. 뿌리가 받쳐주지 않는 나무 같은 나를 보면 어찌할 수 없는 비감에 빠져 잠시 우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만약 스스로 조상을 택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지금 같은 모습으론 살지 않을 테니 잠시나마 산지에 대한 문제로 혼란스럽다.
생애에 가장 역동적이고 빛나는 시간들을 생산적인 일에 쓰지 못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게 선뜻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에 그들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가당키나 한 일일까, 삶의 순환 과정에서, 어떤 경우엔 비록 배신이란 상처를 받기도 했으나 내게 베풀어준 인간적인 동정심의 가치에 비하면 그런 고통이나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었던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 대명천지에 도망자 신세를 면한 지금, 내 숨이 끊어지는 그날,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난 그들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역경으로 점철된 내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진정한 자유와 존중받는 인권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과정 자체를 누리고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유와 가정, 이 두 가지 행운을 동시에 가지게 된 지금, 나는 난민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 수 있게 된 행운의 주인공으로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끝으로 날 환영해준 대한민국에서 인제는 보란 듯이 잘 살기 위한 일만 남았다. 비록 산 설고, 물 설고, 낯도 선 곳이긴 하지만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지, 성공적인 삶의 구현을 위해 전력투구, 매진하는 중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고, 얻을 수가 있는 아! 대한민국, 이 기회의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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