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한가로운 독자에게'

다소 자극적인 제목에 끌려 이 글을 읽게 됐다면 미리 사과부터 드린다. 하지만 이미 400여 년 전에 스페인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가 써먹었던 표현이다. 그렇다. '돈키호테'의 서문 첫 구절이다.

물론 세르반테스가 '어그로꾼'(인터넷에서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이진 않았을 테다. 오히려 그는 겸손함에서 이런 당혹스러운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가해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나 읽을 만한 글이란 의미였다. '재주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제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라는 다음 글귀처럼.

어쩌면, 한가로웠던 것은 독자가 아니라 세르반테스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던 중 이 소설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자유를 박탈당한 죄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을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한가한 율사들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는 현직 부장판사가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전 대표의 로비를 받은 정황이 드러나 수사 선상에 올랐다. 정 씨 회사에 유리한 판결을 해줬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사실로 드러난다면 법치국가에 대한 국민 신뢰를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중대사안이다.

사법부의 다른 한 축에선 '검란'(檢亂)이 재연되고 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정 씨 수사와 관련, 청탁'알선 명목으로 3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현직 부장검사 역시 정 씨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자택'사무실 압수수색을 당했다. 여기에다 현직 검사장은 기업주에게서 9억원대 뇌물을 받은 혐의로 해임됐고, 청와대 민정수석은 온갖 추문에 휩싸여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이쯤 되면 영화 '내부자들'이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하다. 지겹도록 이어지는 고위층의 탐오(貪汚)를 전하는 신문 지면은 숫제 '19 금(禁)' 수준이다. '먹고살 수 있게만 해주면 되는 개'돼지'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기사도(騎士道)소설을 읽다 미쳐버린, 늙고 가난한 시골 귀족 이달고처럼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되어 손수 정의 구현에 나서야 하나?

'대한민국 0.1%' 수재들이 시정잡배보다 못한 희화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개인적 일탈로만 치부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자정 능력이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하니 열대야처럼 답답하다. 대통령이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헬조선'이란 자조는 결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조선'이란 단어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한 사례는 동서고금에 흔하디 흔하다.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 지구 반대편의 조선도 그랬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료에 대한 처벌은 후손의 벼슬길까지 막을 정도로 강력했다. 직위를 이용해 재물을 긁어모은 벼슬아치의 명단인 장리안(贓吏案)에 오르면 사면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출세지향주의가 판치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으려면 서둘러 도입해야 할 제도가 아닌가 싶다.

한가하기는 청와대라고 예외가 아닌 듯하다. 공익광고 같았던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가 팩트부터 틀린 탓이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가 중국 뤼순이 아니라 하얼빈이라고 언급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안 의사를 알아보지 못한 아이돌(idol) 가수처럼, 청소년들이 배울까 두렵다. 그래도 청와대는 아무 반성이 없다.

한 줌 내세울 것 없는 청맹과니인 나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조만간 시행되는 '김영란법'에 미관말직 기자들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가하게만 있을 때가 아니다. 한 끼에 3만원이 넘는 식당부터 알아봐야겠다. 번지수를 잘못 알고 찾아오는 이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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