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정책실장 시절 신용하 교수를 처음으로 대면했다.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한일 관계와 독도 문제 등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대응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도 우리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후 다시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느낀 것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이 배우고 느낀 것을 그대로 대통령과 정부에 전달했다. 한일 관계와 독도 문제에 대한 대응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71주년 광복절을 보내며 매일신문 서울지사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독도 이야기에 집중했다. '우리 땅, 대한민국의 땅' 이전에 대구경북의 땅이기 때문이다. 40년 가까이 서울대교수로 있으면서 우리 사회의 민족사 연구와 독도 연구를 이끌었다. 지금은 학술원 회원으로 울산대학교 석좌교수와 독도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등 많은 저서가 있다.
김병준: 지난주가 광복절이었다. 민족사와 관련하여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하지만 오늘은 독도 문제에 집중했으면 한다.
신용하: 그게 좋을 것 같다. 큰 지면이지만 이 문제 하나만으로도 넘칠 수 있다.(웃음)
김병준: 먼저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하는데, 무얼 가지고 그러나?
신용하: 17세기에 약 70년간 자기네들이 실효적 지배를 했다는 주장이다. 그때는 울릉도를 죽도로, 독도를 송도로 불렀는데, 당시의 도쿠가와 막부가 시마네현의 두 어부 가문에 죽도 도해면허(渡海免許)와 송도 도해면허를 내어 준 게 있다. 즉 이 두 섬에 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허가해 준 것인데, 이게 바로 두 섬이 일본 영토였음을 증명하는 것 아니냐는 거다.
김병준: 도해면허를 내줬고, 또 그 면허로 고기잡이를 했다?
신용하: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이 도해면허의 성격이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고, 그래서 도해면허를 받아야 외국으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무슨 뜻이냐? 도해면허를 내주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김병준: 그때 조선은 뭘 하고 있었나? 일본이 이러는 걸 보고만 있었나?
신용하: 임진왜란 때 일본은 울릉도에 들어와서 주민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다. 이에 조선은 주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공도(空島)정책, 즉 울릉도를 비워두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 사이 이걸 안 일본이 그렇게 한 것이다.
김병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도 이 두 섬이 조선 땅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고?
신용하: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일례로 1693년 봄 안용복이 어선단을 이끌고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일본 어부들과 시비가 일었다. 일본 어부들이 협상을 하자고 해서 일본 어선에 올랐는데, 일본 어부들이 그대로 납치해 일본으로 압송을 했다. 그러고는 일본 막부의 심문을 받도록 했다.
김병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신용하: 그런데 이 어부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조선의 공도정책을 위반한 죄이고, 벌을 받는다면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아야지 일본 막부로부터 심문당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병준: 대단한 인물이다.
신용하: 이에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왕조가 만든 영토해설서인 등을 살펴보는 등,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조사를 한 후 이 두 섬이 조선 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출어와 도해를 금지시킨다. 대마도 도주 등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이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고 했다.
김병준: 그게 언제였나?
신용하: 1696년 1월의 일인데 단순히 그러고 만 것이 아니다. 이 결정을 조선 조정에도 외교문서로 알리면서 친교를 청했고, 이에 조선 조정도 답을 하며 3차례나 외교문서가 교환되었다.
김병준: 안용복은 어떻게 되었나?
신용하: 일본으로부터의 구금이 풀려 조선으로 돌아왔다. 도쿠가와 막부가 그의 주장과 당당함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김병준: 지금의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그때의 지도자들 같으면 좋겠다.
신용하: 일본 막부는 이 결정을 잘 지켰다. 일례로 1832년 하치 우에몽이라는 사람이 막부 허가 없이 독도와 울릉도에 들어갔는데, 그는 이 일로 참형에 처해졌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외국에 허가 없이 다녀왔기에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가 첨부되어 있는데 여기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임을 표시하는 적색이 칠해져 있다.
김병준: 막부가 타도된 이후의 명치유신 정부는 어떤 입장이었나?
신용하: 초기에는 막부의 입장을 그대로 유지했다. 1876년 9월 내무성이 일본 지도를 제작하면서 각 지방 '현'에 그 지역 초안을 그려 올리라 지시한다. 이때 시마네현 지사가 울릉도와 독도를 어찌할 것인가를 질의한다. 현이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라는 뜻이었다. 이에 내무성은 5개월여 조사 끝에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김병준: 그게 명치유신 정부의 입장이 되나?
신용하: 그렇다. 내무성의 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당시의 최고 통치기관인 태정관(太政官)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도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를 심득(心得), 즉 명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김병준: 그 지령이 존재하고 있나?
신용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실장을 할 때 그 존재를 처음 알았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일본의 젊은 학자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을 복사해 주면, 일본에서 찾은 이 지령을 복사해서 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논문으로 먼저 발표한 다음 공개해야 하고, 학문적 목적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확인한 사료이다.
김병준: 정말 중요한 문건인 것 같다.
신용하: 명치시대 국가의 최고기관인 태정관이 이를 확인했다.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이 어디 있겠나. 도쿠가와 시대에 막부의 최고 지도자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문서를 보내온 것에 더해서 말이다.
김병준: 그러면 일본이 독도를 두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신용하: 러일전쟁 때이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오는 것을 감시할 망루가 필요했는데, 그때부터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하면 동해가 일본 영해가 되고, 그럼으로써 동해 제해권도 가지게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된 것이다.
김병준: 그래도 무슨 근거와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신용하: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무주지, 즉 주인이 없는 땅이라는 가정을 꾸며냈다. 마침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어부가 독도 주변에 서식하는 강치(일명 바다사자)잡이를 독점하기 위해 일본 정부를 찾아가 대한제국에 청원을 넣어 달라고 한다. 이를 접한 해군성이 그럴 게 뭐 있느냐, 이 기회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편입시키자 한다. 그러면서 그런 청원 대신 무주지 영토 편입 청원서를 내라 한다.
김병준: 무주지라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느냐?
신용하: 물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은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우며 영토 편입을 결정했다. 다케시마라는 이름도 이때 붙여졌다. 국제법상 무주지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에 조회를 해야 하는데 그러한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김병준: 대한제국은 항의도 하지 않았나? 1월이면 을사늑약 10개월 전이라 외교권도 있었을 텐데.
신용하: 몰랐다. 일본은 이 중대한 내각 결정을 중앙관보에 올리지도 않았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지방공무원 내부 자료인 시마네현 현보에 작게, 두 줄로 고시한 것이 전부다. 시마네현은 2005년부터 이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김병준: 해방이 되면서 독도는 다시 우리 땅으로 정리되었다.
신용하: 1945년 9월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동경에 설치되면서 영토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1946년 1월 스카핀(SCAPIN), 즉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 677호로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독도가 한국 영토로 공표되었다.
김병준: 그런데 이게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흔들리지 않았나?
신용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강화조약인데, 이때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기 위해 맹렬한 로비를 펼친다. 조약 초안을 작성하는 미국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는데,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어 주면 미국이 레이더기지와 기상관측소로, 그리고 폭격연습지로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김병준: 결국 미국이 흔들렸다.
신용하: 1차부터 5차 초안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6차 초안 시안에서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했다. 다행히 이에 대해 영국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3국이 반대했다. 그러고는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내용의 영국 초안을 별도로 만들었다. 그 결과 두 개의 초안이 회의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자 미국이 합동초안을 만들자 제안했고 이를 영국이 받아들였다.
김병준: 그 합동초안에서 독도는?
신용하: 조약문 간결화를 위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는 모두 명칭을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독도는 무인도로 간주되어 명칭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도 울릉도 거문도 3개의 섬만 이름이 올라갔다.
김병준: 일본은 이걸 독도가 일본 땅임을 묵인한 것이라 주장한다.
신용하: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스카핀 677호가 있다. 연합국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법적 효력을 지닌 지령이다. 또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결과를 일본의 중의원과 참의원이 비준을 했는데, 여기서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로 재확인했고,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었음도 재확인했다. 이때 영토와 관련하여서는 스카핀 677호가 확정한 지도와 동일한 연합국이 인정한 가 붙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역시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확인했고, 이를 일본 의회도 인정한 후에 비준한 것이었다.
김병준: 일본의 억지는 그렇다 치고 우리 스스로는 독도와 관련하여 잘하고 있나? 때때로 그런 것 같지 않아서 묻는 말이다.
신용하: 미 국무부 산하에 지명위원회가 있다. 여기서 세계 각국의 영토와 지명을 규정하는데, 2008년 7월 독도를 '주권 미지정'(sovereignty undesignated) 지역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미 국회도서관에서 일하는 한국인 사서 한 사람이 발견했고, 이에 우리 국민과 정부가 미국에 항의를 해서 바로잡았던 일이다.
김병준: 기억이 난다.
신용하: 이때 주미 한국대사관 측이 미 국무부장관에게 재발 방지를 요청하자 미 국무부장관은 그렇게는 못 한다고 했다고 한다. 너희 땅이면 주권 행사를 분명히 해야지, 너희 스스로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김병준: 일본과의 어업협정에서 독도를 중간수역 안에 놓은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영토 문제와 관계없는 그야말로 어업협정이다.
신용하: 영토와 관계없는 것은 맞다. 그러나 어업협정 제1조가 배타적경제수역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1997년부터 2005년까지 8년간 배타적경제수역 기점을 독도가 아닌 울릉도로 했다가 2006년에 독도로 교정했다.
김병준: 이를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나? 개인적으로도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외교에 참담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다행히 우리도 2006년부터 독도를 배타적경제수역의 기점으로 선언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정말 답답하다.
신용하: 일본 외무성은 우리 외무부와 다르다. 강력한 국가주의 문화 아래 외국을 지배하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해외 업무를 담당하는 고등경찰조직 일부까지 운영하기도 했다. 그만큼 전략적이고 조직적이고 치밀하다. 이에 비해 우리는 느슨하다. 그래서 독도와 관련해서도 걱정이 많다.
김병준: 끝까지 귀한 말씀을 주셨다. 대단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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