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기억은 대체로 사선이다

-나희덕의 '빗방울 빗방울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나희덕 '빗방울, 빗방울들' 전문)

장마가 예보된 날, 이야기를 썼다. 사라져가는 당신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를. 당신은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결국은 당신에게 전해지지도 못하고 서랍 속의 어느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가 결국은 사라져버릴 그동안의 이야기를 썼다. 마지막으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머릿속으로 흘러 지나가는 수많은 풍경들.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버리기도 하고 생성하기도 한다. 의미는 시간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사실이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쏟아내는 이야기들도 이미 의미화가 될 수 없는 허상일 수도 있다.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굳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일상들이 빗방울처럼 사선을 만든다. 가끔은 수직으로, 가끔은 출렁거리면서, 가끔은 엎질러지면서 말이다.

나희덕이라는 시인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늘 이런 마음은 곤혹스럽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느끼는 본질적인 열등감은 차치하고라도 그녀의 시가 지닌 여러 겹의 마음은 빈번하게 나를 절망에 이르게 한다. 물론 그 절망은 시인 자신의 느낌이기도 하다.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라는 같은 시집에 실린 시에서 그녀는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 정도의 시간은 나도 걸려도 되니까. 나희덕의 시는 따뜻함과 단정함의 미학인데 따뜻함이 모성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훼손된 것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단정함은 삶과 사물에 대한 성찰적이고 자기 발견적인 윤리 감각에서 나온다고 어느 평론가는 말했다. 단정함이 따뜻함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데 그녀는 그걸 이룬 셈이다. 이 시는 그녀의 2001년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에 실려 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내 눈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다.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이다.(시인의 말)'라고 말했다.

'문학 노트'를 연재하면서 왜 2000년대 이전의 작품을 주요 대상으로 삼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대답은 아주 단순하다. 단지 지나간 시간과 지나갈 시간이 엇비슷한 지금 '앞으로 읽을 책의 목록'보다는 '지금까지 읽은 책의 목록'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그 '읽은 책의 목록'에 대한 나의 언어라면 또 다른 대답이 될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언어들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말이다. 그래도 나에게서 시작된 그 언어에 대하여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다하고 싶다. 그 언어가 '지금, 여기'와 결부된 언어라면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곤혹스럽지 않을까? 그래서 그 언어들을 잠시 뒤로 돌려놓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그런 언어들은 대부분 사선이다. 그런 사선들은 아마도 또 다른 '읽은 책의 목록'이 되어 타인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있을 게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밖에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 빗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지 않아도 빗소리는 들린다. 비가 멈추어도 빗소리가 들린다. 빗소리는 살아있다. 창을 닫고 소리가 사라진 빗방울은 사선이다. 엇갈림이다. 가볍게 떨어져 내리는 비애이다. 엇갈림과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대개가 베개 구석에 버릇처럼 날리던 내 번민의 조각들이고, 미처 지우지 못한 상처의 흔적들이다. 그래서 사선은 날카롭고 아프다. 아프다는 표현은 안 하려고 했지만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번민과 상처, 그것이 만들어낸 기억은 대체로 사선이니까.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