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산군의 맏형격인 속리산. 세속(俗)을 떠나(離) 선계로 든다는 이름처럼 예부터 도인(道人), 군자들의 수도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맥을 이어 보은의 북쪽에서 수행 터로 자리를 튼 곳이 있다. 바로 도명산이다. 도(道)가 맑게(明) 깬다는 산 이름처럼 괴산의 기도처로도 명성이 쌓였다. 한국 명산 16좌, 이번 달엔 중원(中原)의 수도 도량 도명산을 다녀왔다.
◆속리산 20여 개 산 중 북쪽 봉우리로 우뚝=아웃도어 브랜드 밀레가 주최하고 매일신문이 후원하는 '한국 명산 16좌' 12번째 산행이 지난 19일 충북 괴산 화양리 일대에서 열렸다.
소백산맥에서 줄기를 이어받은 도명산은 643m로 중급 산. 속리산 국립공원의 20여 개 산'봉우리 중 하나로 북쪽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으로는 군자산(948m), 칠보산(778m)을 세우고 동으로는 대야산(931m), 남으로는 낙영산(746m), 속리산(1,054m)의 호위를 받고 있다.
도명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화양구곡(華陽九曲)이다. 가령산(642m), 사랑산(647m)이 만들어 낸 계곡은 남쪽 방향으로 낮게 흐르며 소(沼), 담(潭), 폭(瀑)을 만들어 낸다. 화양은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인연으로 유명하다. 제자이자 국정 파트너였던 효종이 승하하자 바로 낙향해 이곳에서 슬픔을 달랬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시작된 구곡(九曲)의 절경은 계곡을 따라 정연하게 배치돼 있다. 6㎞ 남짓한 계곡에는 금모래가 흐른다는 금사암, 별을 관찰했다는 첨성대, 구름을 뚫는다는 능운대, 백학이 모여든다는 학소대가 차례로 펼쳐진다.
◆전국 1천여 명 원정대 폭염 뚫고 전진=지난달 덕유산에 이어 이번 산행에서도 '폭염 경보' 문자가 휴대폰을 울렸다. 이 더위를 뚫고 오늘도 전국에서 1천여 명의 원정대가 화양리로 집결했다.
오늘도 카우보이 모자를 쓴 엄홍길 대장이 땀을 훔치며 단상으로 올라왔다. 엄 대장의 드레스 코드는 이번에도 '섹시 가이'. 반바지 차림, 구릿빛 근육에 원정대원들은 '엄지 척' 환호로 대장을 맞았다. "중원의 명산 도명산, 괴산의 명소 화양계곡에서 마음껏 자연을 즐깁시다." 인사말을 신호로 일행은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산행 전 주최 측에서는 원정대원들에게 오버페이스를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 행사가 고온에서 진행되는 데다 원정대의 70%가 여성이고 이 중 상당수가 고령자들이기 때문이다.
산행 코스의 절반은 화양구곡을 끼고 오르는 계곡 산행이다. '충북의 소금강'이라는 별칭답게 계곡은 트레킹 내내 절경을 풀어내고 있었다.
◆낙향 송시열 계곡 곳곳에 흔적 남겨=화양동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다. 제자였던 봉림대군(효종)이 청에 인질로 잡혀가자 반대파에 밀린 우암은 괴산으로 몸을 피해 낙향했다.
스스로 화양동주(洞主)로 부르며 이곳에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구곡의 이름을 짓고 그 흔적을 바위에 새겼다.
요즘 '사드 사태'와 관련해 재밌는 유물이 있다.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다. 이 묘는 임진왜란 때 국운을 기울여가면서까지 조선을 도와준 명의 신종(神宗)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우암이 설립을 주도했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미국과 선린관계를 맺고 있지만 명청 교체기 때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중국은 조선을 지켜주던 또 하나의 혈맹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1644년 명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조정에서는 명의 은혜를 추모하고, 신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보단과 만동묘를 세웠다. 명 멸망 뒤에도 스스로 중국의 소국이 되길 바랐던 뿌리 깊은 사대주의는 결국 조선 왕조의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우암의 이런 지나친 명분주의는 후대에서도 논쟁거리를 낳고 있다. '도덕적 권위로 문화국가의 방향을 잡은 선비'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존명(尊明) 사대주의의 화신'으로 몰아 평가절하하는 학자들도 있다.
윤경태(52'대구시 상인동) 씨는 "후대의 평가는 차치하고 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등장한다는 우암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정상에 오르면 충북 명산들 한눈에=학들이 둥지를 튼다는 학소대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본격 산길이 시작된다. 경사길을 1시간쯤 오르자 바위지대가 나타났다. 급경사로 펼쳐진 철다리를 올라서자 비로소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10분쯤 오르자 낙양사 절터와 마애불상이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세가 예사롭지 않다.
절터에는 큰 바위굴이 있는데 예부터 수행자들이 많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모두 3기. 좌우에 협시불을 세우고 중앙에 본존불을 모신 삼존불이다. 낙양사 터에는 지금도 많은 기도객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뙤약볕을 뚫고 데크에 의지해 정상으로 오른다. 이미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 시원한 바람을 쐬며 땀을 식힌다. 이제야 비로소 경치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동남쪽에서 백악산, 금단산이 남쪽에서 톱날 같은 속리산 주봉들의 암릉이 실루엣으로 펼쳐졌다.
정상석 앞에서 원정대와 한참 동안 기념촬영을 하던 엄 대장이 겨우 인파를 피해 정상으로 올라왔다.
"'도를 깨치는 산'이라는데 깨달음 좀 얻으셨습니까?" 농담을 건네자 "이 사람아, 이 더위에 웬 '돌을 깨는 소리'를 하고 있나." 엄 대장의 썰렁한 아재 개그 덕에 아주 잠깐 더위를 떼어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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