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적에 맞서기 위해 만든 관념 '민족'
내부 갈등 은폐하는 애국주의로 동원돼
참전'국기 게양 독려 되레 반발심만 불러
국가 발전 위해 '주인의식' 덕성 갖춰야
'민족'이란 단어의 나이는 몇 살일까. '반만년 역사를 가진 민족'이란 말이 있으니 오천 년? 실망 마시라. 민족의 나이는 오천 살이지만, '민족'이란 말의 나이는 150살 정도이다. 이 나이는 400년 이상을 산다는 그린란드 상어가 막 번식에 나서는 때다.
'민족'이란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이다.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한 때다. 이 시기에 내부결속력을 얻기 위해 탄생한 관념이 '민족'이다. 그 이전에는 민족은 있되, '민족'이란 관념은 없었다. 서양의 경우도 '민족'이란 관념은 외부의 적들을 의식하며 영토의 경계를 확정 짓던 근대국가 형성기에 내부통합의 필요에 따라 나타났다. "상상의 공동체" 민족은 '그들'과의 적대를 위한 상상 속의 '우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민족주의는 외부의 위협을 이겨내는 데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다급하게 물리쳐야 할 적이 없는 상황이 되면 유용성이 반감된다. 그래서 때로 스스로 존재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내부에서 적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사회적 이견을 억압하기도 한다. 그 결과로 사회 내부의 실질적인 정치적 갈등은 덮여 버린다. 바로 이점 때문에 민족주의는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은폐하고 무마하는 방편으로 의도적으로 동원되기도 한다. 이렇게 동원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가 애국주의이다.
애국주의는 애국심을 특정한 형태로 강요한다. 작년에 국가보훈처가 실시한 '애국심 조사'에서 애국심의 중요한 지표는 '전쟁 발발 시 대응태도'와 '정권에 대한 복종 정도'였다. 또 최근에는 국경일 태극기 게양 여부가 애국심의 지표인 것처럼 여러 지자체가 국기 게양 캠페인을 벌였다. 국회에서는 한 술 더 떠 국가(國歌), 국화(國花) 등 국가 상징물을 법으로 규정하는 각종 법들이 발의됐다. 이런 조치들이 과연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효과가 있을까? 물론 아니다. 이런 정책들은 이미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왜 그럴까?
다급하지 않은 전쟁에 대한 태도가 애국심의 지표라면 역설적으로 애국은 쉬울 수도 있다. 전쟁이 없는 시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태극기 열심히 달고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것 역시 실질적 국가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애국이 결국 국력에 기여하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애국은 다른 무언가를 더 필요로 한다. 나는 그게 '시민다움'의 덕성을 갖춘 시민의식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국가의 수준은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는 전쟁이 발발하면 참전하겠다는 애국심의 고양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국력이 신장되면 안보는 뒤따라온다. 국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은 시민들의 주인의식이다. 세입자는 자기가 사는 집을 관리하지 않고 활용할 궁리만 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주인의식을 가지려면 국가가 자기 삶을 지켜주고 이끌어주는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다움의 덕성이 발휘돼 사회가 전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심각한 양극화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한 현 시점에서 기껏 태극기 게양이나 독려하는 '나라 사랑법'은 반발심만 불러올 뿐이다. 차라리 혐오와 차별을 금지하는 특별법으로 내실 있는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더 실질적인 애국이다.
애국주의에 몰두하는 것은 주체적인 태도 같지만 사실은 의존증이다. 일차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그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애국주의는 현실에 기초하든 상상적이든 외부의 적을 전제로만 '우리'라는 결속을 이룬다. 이 점 때문에 '우리' 스스로 가꾸는 삶의 내용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외부의 상징물에 집착하는 이차적 의존이 나타난다. 애국주의는 피해의식에서 시작해 미신적 도착(倒錯)으로 귀결되는 증상에 다름 아니다. '그들'에 기대지 않는 '우리'가 되려면 강조되어야 할 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시민다움이다. 나와 가족의 삶이 타인과의 공존 속에 있음을 자각하고, 공동체의 일을 내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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