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시대의 그늘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백정의 신분해방을 주창한 '형평사 운동' 주역 중 하나인 장지필(張志弼)은 이 무거운 명제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백정의 아들이었다. 조선의 '불가촉천민'인 백정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학교도 가지 못한 채 혼자 글을 익혀야 했다. 타고난 명석함 덕분에 일본 유학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호적에 새겨진 '도한'(屠漢: 도축을 업으로 하는 자)이라는 붉은 글씨로 인해 총독부 관리와 같은 중요한 직책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글을 익힐 정도, 불합리한 현실에서 탈피하려는 의지가 강렬했고 그 의지는 일본 유학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론화되었다. 일본 유학 동안 법학이라는 근대적 학문을 공부하는 한편, 박열과 같은 조선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귀국 직전에는 일본 최하층 천민들의 인권해방운동이 일본 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목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자유, 평등과 같은 인간 본연의 권리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조선 신분 질서의 비합리성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봉건적 신분질서가 자신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0년대, 조선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백정'의 신분해방 운동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소설가가 조명희(趙明熙)이다. 조명희는 소설 '낙동강'(1927)에서 장지필 등이 1923년 진주에서 일으킨 형평사 운동을 다루고 있다. 사회주의자 박성운이라는 인물의 혁명적 삶을 중심으로 한 이 소설에는 박성운의 이념적 동지이자 연인인 로사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로사로 불리는 이 여성은 백정의 딸로서 박성운이 이루지 못한 사회혁명의 유업을 이어받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여러 지류가 모여서 한 줄기로 도도하게 흐르는 낙동강처럼 조명희는 소설 '낙동강'에서 분열된 사회운동을 하나로 단합시킬 인물로 소작농도, 공장 노동자도 아닌 백정의 딸 로사를 지목한다. 이미 현실에서 백정의 후예 장지필이 백정의 신분해방 운동을 일으키고 제국 일본의 최하층 천민들과 연대를 형성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을 목도한 직후였으니 이런 기대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는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혁명적 힘이 가장 소외되고, 가장 박해받은 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이 발표된 지 10여 년 뒤, 백정에 대한 조선사회의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혁명적 변화를 꿈꾸고 선도하던 장지필과 조명희의 삶은 참으로 안타깝게 흘러가고 있었다. 전근대적 신분질서를 전복하고 평등한 사회를 꿈꾸던 장지필은 백정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한 '형평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일제에 협력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소련으로 망명했던 작가 조명희는 일본 간첩 혐의로 하바롭스크에서 소련군에게 총살당하며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차별과 억압이 지배하고 있던 192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 장지필과 조명희라는 두 명의 혁명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로 향하는 작은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근 백 년이 지났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 덕분에 '백정'은 이제 죽은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성소수자, 다문화 가정, 새터민, 이주민에 대한 새로운 차별적 단어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장지필과 조명희가 삶을 걸고 이루고자 했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언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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