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종이꽃 편지

스페인어 선생님이 수학 자습 중인 우리 딸을 복도로 불러냈다.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지난 학기를 마칠 때, 스페인어 선생님에게 직접 만든 색종이 꽃을 봉투에 붙여서 감사의 손 편지를 드렸는데, 선생님이 감동을 받고 딸을 찾아왔던 것이다. 선생님은 교사 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딸의 편지를 읽으며 자신이 학생들에게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고 새 힘을 얻게 되었다며 딸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딸은 선생님의 깊은 속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아파서 선생님을 꼭 안아 주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만날 때, 인사치레용 선물 구입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 년에 한두 차례 교사와 학부모 정규 면담을 한다. 나는 첫 아이의 면담이 있던 날, 선물 꾸러미를 준비해서 학교에 갔는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학부모들의 빈손을 보며, 마치 나만 선생님께 내 자식 잘 봐달라고 청탁하는 듯 비칠까 줄곧 민망했다. 그 일 이후 나는 선생님을 만날 때, 선물에 대한 부담 없이 빈손으로 찾아가는 자유로움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거창한 선물은 아니지만, 선생님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는 많다. 선생님에게 축하나 감사의 선물이 필요할 경우, 학급 부모 대표가 학부모들에게 공지해서 일정 소액을 모아 공동으로 선물을 전달한다. 그리고 연말이 되면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카드와 작은 선물을 전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의 정성에 일일이 고맙다고 감사 답장을 보낸다. 학교에서도 학교의 발전 행사 추진을 위한 기부를 권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공적으로 공지문을 통해 알려 학부모 전체의 활동으로 장려한다.

그러나 한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의 학교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고 들었다. 한인 학부모들의 지나친 물질 공세로 미국 교사들의 눈이 높아져서 어지간한 선물에는 감사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어떤 학교는 전체 학부모회가 있지만 한인 학부모회를 따로 두어 막강한 재력으로 학교를 후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한 학교에서는 한인 학생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학교장에게 호화 한국 관광을 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지나친 치맛바람에 미국 학부모들이 불만을 토로했고, 한인 학부모들의 과도한 물질 공세를 막기 위한 안건까지 나왔다고 하니, 안에서 새던 바가지 밖에서도 새면서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다.

이제 무더위를 뒤로하고 한국과 미국의 학교들은 모두 새 학기를 맞이한다. 또 한국은 9월 말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을 통해 뇌물성 촌지를 근절하여 더 깨끗한 교육 풍토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 법적 회초리를 꺼내 들 때, 최근 급속히 냉랭해지고 있는 사제 관계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요즘 교사들은 친절한 학부모가 가장 무섭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누구보다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부모와 교사가 만남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경계 태세를 곤두세우게 되었다는 말이다.

법적 잣대를 들이대기 전, 먼저 작은 선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방안, 부모가 아닌 학생이 직접 교사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방법, 자기 자식만 돋보이기 위한 이기적인 기부보다 학교 공동체적 정신에서의 기부 형태 개발 등 건전한 방향성과 대안들을 그려주어야 할 것이다. 종이꽃 손 편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미는 제자와 그 편지를 받고 눈물겹도록 고마워하는 선생님처럼 작은 선물로 감사의 마음을 오롯이 전달할 수 있는 사랑의 기술을 익힐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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