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가수 강영철

"통기타 메고 30년 만에 컴백…잔잔한 얘기 나누고 싶어요"

▷1957년 대구시 중구 교동(동성로) 출생 ▷대구 중앙초
▷1957년 대구시 중구 교동(동성로) 출생 ▷대구 중앙초'영신중'청구고 졸업 ▷대구미래대 방송영상학과 졸업 ▷대구 '코리아음악감상실', 서울 '쉘부르' 가수 ▷듀엣 '한마음' 결성 ▷한마음 1집 앨범(꿈이여 사랑이여, 가슴앓이) ▷한마음 2집 앨범(갯바위, 말하고 싶어요) ▷한마음 3집 앨범(친구라 하네, 눈물) ▷한마음 4집 앨범(사랑살이) ▷신작 앨범 '바람과 나무' '바다의 초대'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1980년대 청아한 목소리의 양하영과 함께 '갯바위' '가슴앓이' '말하고 싶어요' 등으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듀엣 '한마음'의 강영철(59).

그에게 음악은 '호흡'과 같다. "음악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전축을 듣고 기타를 치며 음악과 함께했던 그는 고교 2년부터 음악감상실로 진출했다. 포크송으로 대구의 음악감상실을 두루 섭렵한 그는 군 제대 후 가족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유명 음악감상실 겸 레스토랑인 '쉘부르'에서 방송인 고(故) 이종환 씨의 오디션을 통과하면서 본격 데뷔한 그는 같은 오디션을 통과한 양하영 씨과 듀엣을 결성했다. 이후 절묘한 하모니를 뽐내며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랑' 연작 앨범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중 갑자기 환상의 커플과 결별하는 큰 사고(?)를 쳤다. 음악계를 떠났다. 그리고 10년 동안 은둔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통기타를 놓고 몇 년 동안 여행만 하며 자숙했다. 그러나 완전히 호흡을 끊을 수는 없었다. 10여 년 전 음원 사업에 손을 댔다가 6년 만에 파산했다. 이후 간간이 음반 작업을 했지만 발표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가 결국 30년 동안 실낱같은 호흡에 연명하다 이제 제대로 숨쉬기 위해 '한마음'이란 이름으로 새 음반을 들고 돌아왔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지하 작업실에서 그의 음악 인생에 대해 들었다.

◆'가을저녁의 시'에 곡을 붙이며

강 씨에게 음악은 어릴 적 시나브로 다가왔다. 오디오 기술자인 이모부 덕분에 학교 입학 전부터 전축을 접할 수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형이 사준 기타와 친구가 됐다.

전축으로 음악을 듣고, 기타로 노래했다. 밥 먹고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기타와 함께 했다. 기타를 안고 잠이 들 정도였다.

중 3 때 우연히 김춘수 시인의 '가을저녁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난생 처음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다. 학창시절 음악 시간 만큼은 무료하게 보내지 않았다. 밤에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생각난 가사와 곡을 노트에 적기도 했다.

고교 2년부터 대구의 음악감상실을 드나들었다. 포크송을 불렀다. 대구 시내 음악감상실과 카페, 레스토랑 등지에서 꽤 유명세를 탔다. 그가 노래하지 않은 시내 음악감상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강 씨는 "당시 음악감상실 관객은 차 한 잔 마시면서 음악에만 집중했다"며 "DJ들은 뮤직박스에서 신청을 받아 음악을 틀면 됐지만, 통기타 하나만 들고 30분가량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은 동성로 송죽극장 인근 '코리아 음악감상실'이었다. 음대 작곡과를 가기 위해 공부했지만, 실기에서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추억의 음악감상실, 대구서 서울로

군대 제대 후 가족을 따라 서울로 갔다. 성인이 된 이상 스스로 먹고살아야 했다. 텐트, 코펠 등 레저용품 제조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영업에 나섰다. 하지만 음악에 심취한 그에게 일에 대한 만족감이나 성취감은 생겨나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의 발길을 서울 유명 음악감상실로 끌었다. 종로 4가에서 명동으로 옮긴 음악감상실 겸 레스토랑 '쉘부르'였다. 가요제를 제외하고 전국 최고의 가수를 많이 배출해온 당시 유일한 오디션장이었다. 쉘부르 오디션을 통과하면 그곳에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고, 전국 어디서나 통기타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방송인 이종환 씨가 오디션을 보고, 주병진 씨가 사회를 봤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가수 지망생들이 매주 몰려들었다. 대구에서 노래깨나 하던 그는 두 번이나 떨어졌다. 이종환 씨는 "다음엔 국내 곡을 한번 선곡해봐라. 내가 팝 칼럼니스트 겸 진행자인데, 그 발음을 듣고 합격을 못 시키겠다"고 말했다. 경상도식 영어 발음이 걸림돌이었던 것.

'부두' '석별' 등 2곡으로 봤던 세 번째 오디션에서는 둘째 곡의 1절도 끝나기 전에 합격을 알리는 조명 13개가 들어오면서 드럼박스가 켜졌다. 가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쉘부르에서 맺어진 '한마음'

20대 초반,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쉘부르에서 솔로로 활동했다. 당시 시인과 촌장, 남궁옥분, 전영, 최성수 등이 쉘부르에서 활동하던 중고참 가수였다. 1년 6개월가량 지날 무렵 쉘부르 오디션을 통해 후배 양하영 씨가 들어왔다. 쉘부르는 오디션 날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통기타 가수들의 라이브가 이어졌다. 대기실에서는 합격자들끼리 기타도 쳐주고 노래도 하며 함께 연습을 했다. 동료들은 그와 양하영 씨를 보면서 "둘이 팀 한번 만들어보지"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한마음'이 탄생했다.

강 씨는 작사'작곡을 전담하면서 기타로 화음을 넣고, 맑은 목소리의 양 씨는 주로 보컬을 맡았다. 쉘부르를 비롯해 서울 유명 음악감상실과 레스토랑을 돌았다. 상당한 인기를 모았으나 앨범을 만드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형 프로덕션사가 선뜻 투자에 나서지 않았다. 5번의 오디션을 거쳐 당시 유명 프로덕션인 '킹박'에서 비로소 한마음 앨범을 만들었다. 방송사 오디션까지 포함해 8번의 오디션을 거쳐 한마음의 노래가 방송을 탔다. 열여덟 학창시절에 음악감상실로 진출했던 그는 꼬박 10년 만인 1981년 앨범으로 마침내 정식 데뷔를 한 셈이다.

"1집 앨범 '꿈이여 사랑이여' '가슴앓이'는 사랑에 대한 이상, 사랑을 통한 아픔 등 사랑을 시작하는 단계를 담았고, 2집 '갯바위' '말하고 싶어요'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보려고 하는, 사랑이 무르익어 가는 단계를 얘기했다"고 설명했다. 2집 앨범은 당시 70만 장 이상 발매되면서 기염을 통했다. 3집 '친구라 하네' '눈물' 등이 너무나 깨끗한 사랑, 무르익은 사랑이라면, 4집 '사랑살이' 등은 사랑을 추억으로 먹고사는, 인생으로 끝이 나는 사랑을 노래했다.

◆결별, 그리고 30년 만의 컴백

사랑 연작 시리즈로 앨범당 평균 30만 장 이상이 팔리던 한마음 절정기에 그는 홀연히 음악계를 떠났다. 1987년 환상의 듀엣인 양 씨와 결별한 것이다. 그는 30년 전의 결별에 대해 '큰 사고를 쳤다'고만 할 뿐 지금도 구체적인 이유나 변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는 "큰 사고를 친 뒤 반성하는 의미에서 음악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10년 동안 은둔할 계획이었다"며 "하지만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여행만 다녔다. 이후 낚시방송(FTV) 초창기에 방송 진행, 프로그램 제작, 제작 위원 등으로 4년가량 활동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직접 활동을 하지 않는 대신 음원 보급에 뛰어들었다. 벅스, 멜론 같은 음원 사업이었다. 입체 사운드를 구현하고 콘텐츠를 다양화하면서 총력 투자를 했다. 그러나 무료와 불법 복제의 힘에 눌려 7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이어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일하는 등 음악과 관련한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그는 "음원 사업 이후 결국 내가 할 일은 음악이란 것을 새삼 절감했다"며 "최근까지 곡을 계속 만들어 다른 가수를 통해 음반을 내놓으려다 결국 직접 나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과 나무, 그리고 바다

마이크를 놓고 대중의 곁을 떠난 지 30년 만에 그는 돌아왔다. 최근 '노크! 2016 한마음 컴백'이란 타이틀의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바람과 나무' '바다의 초대' 등 두 곡이다.

1980년대 한마음을 통해 '포크송'과 '포크록'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한 '록'이다. 록 발라드와 비트가 강한 록 등 두 곡이다.

'바람과 나무'는 사랑을 모토로 하고 있지만, 인생을 얘기하고 있다. 나무는 늘 한자리에 서 있으면서 세월이 가면서 뿌리가 깊어진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늘 떠돌아다닌다. 존재하지만 머물지 않는 바람이 강 씨의 인생과 흡사하다. 그는 "떠돌아다니지만 사랑에 안주하고 싶은 외로운 바람을 인생에 빗대 만든 곡이 바람과 나무"라고 말했다.

'바다의 초대'에 대해 그는 "바다의 여러 생명체를 보고 느끼면서 삶의 지혜를 찾고, 아픈 세대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곡을 썼다"고 했다.

강 씨는 음악을 떠난 30년 공백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앞으로 지속적으로 음반을 발표할 계획이다. 꾸준히 대중들과 호흡하면서 잔잔한 얘기들을 나누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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