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필자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중심가를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마드리드 국립박물관에 걸려 있는 벨라스케스, 고야, 달리, 피카소 등 스페인 거장들의 그림들을 오전 내내 서서 본 후라 그냥 앉고 싶었다. 미술책에서 보았던 그들의 작품은 끈질긴 호기심과 가라앉은 상상력을 일으켜 세웠다. 실제 크기는 거대했고, 색채 또한 강력한 마술을 걸어왔다.
오후 무렵 시내 중심가 광장에 위치한 큼지막한 돈키호테 동상 옆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집시 여인들의 현란한 몸놀림이 필자의 시선 속으로 들어왔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 빨간 치마를 두른 그녀들은 기타 반주에 맞춰 거친 야성을 발산하고 있었다. 춤을 에워싼 기타 소리는 영혼의 밑바닥에서 끌려나온 절규처럼 들렸다.
"플라멩코를 좋아하세요?"
집시 춤판에 홀려 있는 필자에게 엉터리 영어 발음의 노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푸른 미소와 빳빳한 코밑수염을 가진 스페인산 중년 남자가 쳐다보고 있었다. 귀찮았지만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여 주었다.
"저건 엉터리예요. 오리지널을 보고 싶으면 오후 9시에 돈키호테 동상 옆으로 나오세요. 시간은 꼭 지켜야 합니다…."
대답을 거부한 사내는 필자의 등을 툭툭 치더니 어수룩한 골목 안으로 멀어져 갔다. 광장 바닥의 대리석이 검게 물들자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싸구려 호텔로 돌아온 필자는 딱딱한 식빵 몇 조각을 삼킨 후 침대에 벌렁 누웠다. 피로가 밀려왔다. 그런데 잠은 오지 않고 사내의 야릇한 눈빛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악당의 미소는 아닌 듯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8시30분이었다. 벌떡 일어나 광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지나 동상 옆에 도착하자 낮에 보았던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안내한 지하 카페에 들어서자 플라멩코 가수의 쉰 목소리가 무겁게 가슴을 쳤다. 옆에는 기타리스트의 현이 느렸다 빨랐다, 부드럽게 풀었다 팽팽하게 조이기를 반복했다.
비좁은 무대 중앙에 홀로 선 댄서는 발을 꽝꽝 굴리고, 손가락을 무드라(mudra)로 일렁이며, 허리와 배꼽을 뱅뱅 돌리고 있었다. 40대를 훌쩍 넘긴 뚱보였지만 춤사위는 엄청 다이나믹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무대 앞에 앉은 필자의 얼굴에 튈 정도였다. 삶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짙은 눈썹, 꽉 다문 입술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낯선 마드리드 뒷골목에서 맺어진 플라멩코와의 인연은 카를로스 사우라의 DVD, 빠코 뻬냐의 LP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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