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창고에 쌓아둔 쌀만 175만t…농민들 한숨 "밥을 잘 안 먹나"

"올해도 대풍입니다. 지난해보다 작황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풍년 들녘을 바라보면서 무거운 마음이 자꾸만 듭니다." 31일 오전 상주에서 만난 한 쌀 전업농은 자신의 논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마음이 편치않아 보였다.

올해도 쌀 풍년이다. 지난해보다 수확량이 더 많아질 것이란 기대치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농민들의 얼굴은 밝지 못하다. 쌀값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쌀 소비도 급락하는 탓이다. 이제 쌀을 보관할 곳 마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풍년→쌀 재고 증가→쌀값 폭락이라는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달라는 농민들의 요구가 풍년 들녘에 울려퍼지고 있다. 식량 주권을 지키는 동시에 쌀 소비도 늘리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논은 줄어드는데 쌀은 자꾸만 늘어

올해 벼농사는 태풍과 병충해 피해가 거의 없어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대풍년이다. 적게 잡아도 지난해보다 생산량이 15%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상주시 농정과 관계자는 "상주는 대부분 만생종이라 이달 중순 첫 수확을 앞두고 있지만 현재 날씨대로 간다면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최소 10%, 많은 곳은 15% 정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벼 재배면적은 최근 10년 사이 17만6천ha(1천760㎢)나 줄었다. 안동 시내 면적(1천521㎢)보다 더 큰 논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이달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벼'고추 재배면적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벼 재배면적은 77만8천734ha로 지난해보다도 2.6%나 줄었다.

10년 전인 2006년 국내 벼 재배면적은 95만5천229ha였다. 올해보다 17만6천495ha가 많았다.

쌀 재배면적은 눈에 띌 정도로 줄지만 농업 기술 향상에다 날씨까지 도와주면서 쌀은 매년 대풍 행진을 거듭, 생산량을 키우고 있다.

결국 쌀 가격은 계속 내리막길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조사한 올해 쌀 20㎏ 연평균 가격(1~8월 평균)은 3만6천188원으로 2013년 4만4천151원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다.

2010년 3만3천390원을 제외하면 2006년(3만6천989원) 이후 올해가 가장 낮다. 경북 시군 가운데 쌀 생산량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상주의 경우, 지난해 8만8천원에 거래되던 40㎏ 한가마가 31일 현재 7만8천원으로 1만원이나 폭락했다.

◆창고에 있는 쌀이 폭탄이다

양곡창고에 재고가 넘쳐나는 것이 쌀값 폭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해마다 쌀 풍년이 계속되면서 사들이는 쌀은 넘치고, 팔리는 쌀은 없는 것이다. 창고마다 넘쳐나는 쌀은 이 물량을 안고 있는 경북도 내 각 농협 경영 상황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다.

6월 말 현재 정부 쌀 재고량은 175만t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 133만t보다 42만t이 많다. 지난달 30일 현재 농협RPC 등 민간에서 보유하고 있는 재고도 지난해보다 4만~7만t 더 쌓여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경북도 내 다른 시군도 마찬가지여서 경북의 올해 쌀 생산량은 대풍이었던 지난해보다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경북의 지난해 쌀 생산량은 60만4천t. 하지만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늘어 63만t에 달할 것으로 경북도는 예측하고 있다.

당장 벼를 수매해야 하는 산지 농협들의 고충도 깊어지고 있다. 재고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올해도 생산량이 증가하면 벼 수매값 결정과 쌀 판매에 진통이 따를 수밖에 없어서다.

농협중앙회 경북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수확기에 경북도 내 농협이 사들인 벼는 사상최대규모인 592만7천403포대. 결국 도내 16곳 농협 미곡종합처리장 전체가 올해 적자를 봤다.

상주만 해도 현재 119개 양곡창고에 5만t의 쌀이 보관되고 있다. 창고운영비용은 연간 21억원이 넘는다. 도내 전체로 따지면 연간 수백억, 나라 모두를 더하면 수천억원이다.

상주 함창농협 관계자는 " 2013년 벼 11만4천여 포대(1포대 40㎏)를 사들였지만 2014년에는 12만여 포대로 늘었다. 대풍이 났다는 지난해에는 2013년의 2배 가까운 20만 포대를 사들여야 했다"며 "올해 대풍인 쌀을 수매하면 이제 창고도 못 구한다"고 털어놨다.

◆무엇을 해야하나?

쌀 재고 물량 감소를 위한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한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있다. 일부 농민들은 "젊은 사람들이 밥을 잘 안 먹는 것 같다"며 "무엇보다 우리 쌀은 우리가 소비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상주의 일선 농협장들은 "예산을 갖고 있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절실하다"면서 "본격적인 쌀 수확기 전에 남아도는 재고 쌀을 사료용과 가공용 등으로 시장격리하는 물량을 크게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적으로 생산량을 더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농협 관계자들은 "국민 식생활 패턴이 바뀐 상태에서 쌀 소비를 늘리기는 어렵다. 생산량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며 "정부에서도 생산량을 줄이는 정책을 쓰고 있다. 여기에 논에 다른 작물을 심었을 때 비용을 지원해주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북도는 쌀값 폭락에 따라 쌀 생산 농가에 대한 특별지원 등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우선 민간 RPC나 민간 정미소에 농어촌진흥기금으로 특별융자를 지원한다. 쌀값 폭락에 따른 이윤 감소로 민간 RPC나 민간 정미소가 쌀 생산 농가로부터 쌀을 수매하지 않는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경북도 김종수 농축산유통국장은 "쌀 수급 안정을 위해 공공비축미와 시장격리미곡도 매입할 예정"이라며 "또 쌀 가공 산업 육성과 수출 활성화 등 쌀 소비를 촉진할 수 있는 지자체 차원의 정책 개발을 서두르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정부 차원에서 쌀값 폭락을 방지하고 원활한 수급조절을 위해 '쌀 수급조절 상설기구'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비례)은 지난 18일 국회 의원회관 간담회실에서 열린 '쌀값폭락 대책 마련을 위한 농민 간담회'에서 "폭락 방지나 원활한 수급조절을 위한 선제적 관리가 필요하다"며 "생산자·정부·정치권과 소비자까지 참여하는 상설기구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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