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상희구 시인

"대구 정서 표현하는 데, 사투리 안 쓰고는 그 맛 못 살려"

바닥을 드러낸 쌀통을 긁는 소리에 눈을 뜬 아이. 이어 들려오는 어머니의 탄식, "아이고 내 새끼들 다 우짜노. 내 새끼들 다 우짜노." 아이는 생각했다. "장구든 북이든 쌀통이든 속을 비우면 다 우는구나. 버어억- 버어억-." 그때부터 아이는 새벽잠을 잃었다.

상희구 시인, 그는 그렇게 자랐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유난히 어려웠다. 신문팔이, 행상, 사환 등 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돈이 없어 중학교를 자퇴해야 했었다. 사환으로 있던 대구소방서 소방관들이 도와 다시 중학교를 다녔고, 이어 대구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커서 섬유회사를 하며 돈을 제법 벌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 문을 닫고 말았다. 방황 끝에 우연히 쓰기 시작한 시(詩), 이후 그것이 그의 인생이 되었다.

그는 대구를 시로 쓴다. 그것도 대구 사투리로 쓴다. 이 시로 대구의 언어, 대구의 정서, 대구의 서사, 대구의 생태를 복원해 내고 있다. , , 등 여섯 권의 시집이 있다. 앞으로 네 권을 더 써 『대구시지(大邱詩誌)』를 완성할 계획이다.

대구에 대한 시작(詩作)이 그의 존재이유이고, 그래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쓴다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부터 물었다.

김병준: 시(詩)가 대부분 대구에 관한 것이다. 대구 풍물, 대구 사람, 대구 골목, 대구 장터… 등, 그것도 대구 사투리로 쓰고 있다. 우선 이것부터 물어보자. 왜 대구인가?

상희구: 대구가 고향이다. 산, 강, 하천, 골목길, 장터, 음식, 사람 등 모든 것이 내 가슴에 하나하나 각인되어 있다. 우리 몸의 일부가 시간이 되면 각질의 형태로 저며 나오듯이, 또 고승(高僧)의 몸에서 응결된 무엇이 사리(舍利)로 응축되듯, 그 각인된 것들이 하나하나 시(詩)가 되어 밖으로 나온다.

김병준: 대구가 주는 의미가 그 정도로 큰가?

상희구: 그렇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쓴다. 대구에 대한 시작행위(詩作行爲)는 내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김병준: 뭔가 특별한 사연이나 기억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대구가 고향이고 여러 가지 사연도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상희구: 어릴 적, 너무 어려웠다. 아버지가 딴 여성과 살림을 차렸고, 우리 식구를 돌보지 않았다. 어머니가 우리 4남매를 정말 어렵게 키웠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집안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정말 너무 힘들었고, 힘드니 외로워지더라. 그래서 그랬던지 온 대구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김병준: 몇 살 때 이야기인가?

상희구: 9, 10살 안팎일 때부터 그랬다. 사실 그때부터 일을 했다. 신문팔이, 행상, 사환 등 안 해 본 게 없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돌아다녔다. 산, 강, 하천, 도랑, 비산동, 남산동 골목들 하며….

김병준: 오늘 뵈러 오는 길에 '허흡 대구시장'이라는 시를 읽었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이야기를 하니까 동인동 시장공관 앞에 갔다고 했는데, 계산해 보니 정말 열두 살 때 이야기이다. 아이치고는 참 이상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상희구: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돌아다니는 게 참 좋았다. 사람이든 골목이든, 미술 전시회든 보고 맞닥뜨리는 모든 게 위안이 되었다.

김병준: 책도 많이 보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상희구: 시집도 많이 읽고, 학교 낼 돈을 떼먹으면서까지 프랑스 영화, 이태리 영화를 보기도 했다. 김동원 극단이 대구 키네마극장(1957년 이후 한일극장)에 오면 무조건 쫓아가 봤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김병준: 이 모든 것들이 시작(詩作)의 바탕이 되는 모양이다. 대구의 모습과 그 속에서의 인생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상희구: 언젠가 500편 가까운 시를 2년 만에 쓴 적이 있다. 어느 방송사 기자가 물었다. 이 많은 시를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쓸 수 있냐고. 이렇게 답했다. "출력은 5분 만에도 하지만 그걸 입력하는 데는 60~7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웃음).

김병준: 대부분 대구 사투리로 쓰고 있다. 그 이유가 뭔가?

상희구: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표준어로 대구를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마치 이쑤시개가 필요한 사람에게 홍두깨를 내미는 격이랄까? 특히 1950년대 등 과거 엄혹했던 시절의 대구 정서를 표현하는 데는 더욱 그렇다.

김병준: 맞다 그런 걸 느꼈다. 절제된 사투리 시어(詩語) 한두 개로 어린 시절이 그대로 복원되는 느낌을 받았다. 사투리가 주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상희구: 대구 사투리는 의성(擬聲)과 의태(擬態)의 표현이 아주 거칠고 투박하다. 그러면서도 그 층이 많아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예를 들어 푸르다는 말도 층이 10개쯤 된다. '파랗다' '새파랗다' '포리스룸하다'를 지나 9단계쯤 가면 '포리족족하다'가 나온다. 애들 입술이 추워서 파랗게 변했을 때 쓰는 말인데 이걸 그냥 표준어로 써서는 대구 정서를 표현하기 힘이 든다.

김병준: 원래 시를 쓰던 분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사업을 한 걸로 알고 있다.

상희구: 45살에야 등단을 했다. 그전에는 섬유사업을 했다.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대구 직조공장에 하청을 주곤 했다. 지금으로 치면 연간 외형이 200억~300억원 되는 규모였다. 돈을 좀 벌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김병준: 그래도 사업을 했는데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나? 그전에 써 본 적이 있었나?

상희구: 전혀 없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나니까 가슴이 공허해지고, 그러더니 묘하게 시가 가슴 속으로 들어오더라.

김병준: 그래도 무슨 계기가 있었을 것 아니냐?

상희구: 하루는 서울 남산공원의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는데,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시와 그림 같은 것을 가르친다고 되어 있었다. 왠지 가 보고 싶어 갔고, 거기서 처음으로 시를 써 봤다. 물론 습작이었다.

김병준: 느낌이 어땠나?

상희구: 김광민 시인이 가르쳤는데, 이 습작을 보고는 '시를 20년쯤 쓴 사람처럼 능숙하다'고 했다. 내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 뒤 선생님이 바뀌면서 나도 그만둬 버렸다. 그랬더니 같이 배우던 사람이 전화를 했다. 선생님이 바로 시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왜 나오지 않느냐고…그래서 다시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김윤성 시인, 그리고 정진규 시인으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김병준: 이 선생님들 평가도 좋았던 모양이다.

상희구: 두 번째 습작을 했는데 김윤성 시인이 극찬을 했다. 주간을 맡고 계셨는데 바로 등단을 시키겠다고 학생들 앞에서 약속을 했다. '낮 꿈'이란 시였는데 실제로 이 시로 등단을 했다. 을 그만두고 미당 서정주 시인과 을 창간한 김윤성 시인이 바로 이 잡지에 등단을 시켜 준 것이다. 이 시로 '문학정신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김병준: 습작 한두 편 쓴 후 등단을 하고, 게다가 상까지 받는다는 게 믿어지지를 않는다.

상희구: 그런 일이 또 있었다. 등단 후 이상하게도 '발해'가 계속 머릿속을 돌았다. 그래서 이라는 걸 썼는데, 정진규 시인이 이를 어디선가 보고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에 연재하자고 했다. 한 편을 싣기도 힘든데 등단한 지 1년도 안 된 사람에게 연재를 하라니? 편집장에게 몇 편이면 되겠느냐 했더니 다섯 편이면 좋겠다고 했다.

김병준: 엄청 기뻤겠다.

상희구: 이만한 격려가 또 어디 있겠나. 그때부터 이미지와 영감이 마구 떠올랐다. 심지어 상형문자와 한자를 해체해서 조형화하기도 하고, 그래서 시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이야기까지 듣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기상천외한 상상력이었는데 무려 100편을 단숨에 썼다.

김병준: 그만한 감성과 열정이 있었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상희구: 좋은 대학에서 정규 문학교육을 받았으면 저런 작품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게 아니니 그런 시가 나온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학벌에 대한 선입관을 줄이는데 기여한 것 같아 더욱 뿌듯했다.

김병준: 시라는 게 많이 배웠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상희구: 어머니의 언어감각이 남달랐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의 별명을 어머니가 다 지어주곤 했다. '너는 모타리(체구)가 작으니까 딸보라 하자' 하는 식으로. 사투리도 마찬가지이다. 때로 그 많은 사투리를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이럴 때도 어머니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고 대답하곤 한다.

김병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사투리로 쓴 시들이 대구의 언어를 복원하고 있다.

상희구: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다. 에 '대구'를 연재하고 있는데, 그 발문을 쓴 정진규 시인이 내 시를 언어의 복원, 정서의 복원, 생태의 복원, 서사의 복원이라고 했다. 또 어떤 분은 시의 형식으로 대구의 인문지리를 녹여 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김병준: 앞으로도 많은 작품을 할 것 같다.

상희구: 우선 『대구시지(大邱詩誌)』를 완성하는 것이다.

김병준: 시지(詩誌)라면?

상희구: 기록한다는 말이다.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 같은 것이 다 시지 형식이다. 모두 10집을 구상하고 있는데 지금 6집까지 냈다. 1집은 대구의 일반 서정, 2집은 장터 풍물, 3집은 대구의 음식과 명소, 4집은 대구인물, 5집은 경상도 사투리의 속살, 6집은 대구의 사찰 재실 서원 문중 이야기이다.

김병준: 그러면 앞으로 나올 네 개의 시집은?

상희구: 7집은 대구의 역참 전설 설화 봉수, 8집은 신 대구 십경(十景), 9집은 민속 세시풍속, 10집은 팔공산을 비롯한 산과 강 하천 등이 될 것이다. 모두 지금 자료조사 중이다. 조사를 하다 보면 흥분도 되고, 영감이 물 밀 듯 솟아오르기도 한다.

김병준: 비용이 문제 될 것 같다.

상희구: 솔직히 힘이 든다. 지금껏 자비로 해 왔는데 이게 거의 바닥이 났다. 시지도 그렇지만 방언사전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게 더 문제다.

김병준: 방언사전? 경상도 사투리사전 말인가?

상희구: 그렇다. 지금껏 새로 찾은 것만 해도 수천 개다. 방언이 뭐 그리 중요하나 할 수 있지만 단순히 그렇지는 않다. 언어의 다양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들꽃이 있어야 백합이 더욱 빛나듯 사투리 속에서 표준어도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들꽃은 들꽃대로 아름다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김병준: 공공기관들이 좀 밀어주거나 독지가가 나와 줬으면 좋겠다. 그야말로 대구와 경북의 모어(母語) 아니겠나.

상희구: 다행히 최근 방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투리 대회나 사투리 시낭송 대회를 하는 곳도 있다. TV 드라마 같은 것도 부산 사투리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그 맛도 대단했고.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다.

김병준: 어쨌든 많은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다.

상희구: 『대구시지』가 완성되고 방언사전을 만들고 나면 소설 하나를 쓰고 싶다. 또 대구와 경북 곳곳의 명소를 둘러보는 천소(千所) 천경(千景)도 쓰고 싶고.

김병준: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있겠나?

상희구: 하는 데까지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가슴이 메워지지 않을 것 같다.

◇시시마꿈과 전칠바꿈

장독 가새는 봉숭아

새미 가새는 쪽도리

도랑 가새는 여뀌

요론 꽃들은 요록쿰

지가 좋아하는 데서

시시마꿈 피고

이월에는 산수유

삼월에는 개나리 진달래

사월에는 영산홍

오월에는 철쭉

조론 꽃들은

조록쿰 철 따라서

전칠바꿈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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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설명

시시마꿈: 각자 따로따로

전칠바꿈: 돌아가며 차례차례

가새: 가 또는 옆

새미: 샘

쪽도리: 채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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