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호구(虎口)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흔히 '호구'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을 한자로 쓸 때 호랑이의 입을 뜻하는 虎口라고 하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만약 보호 장구를 뜻하는 호구(護具)나 입에 풀칠하는 불쌍한 상황을 뜻하는 호구(糊口)라고 한다면 좀 그럴듯한 민간 어원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護具는 몸을 지키기 위해서 대신 맞는 역할을 하니까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을 위해 사는 호구의 특성과 맞아떨어질 것 같고, 남한테 이용만 당하다가 입에 풀칠도 못하게 되니까 糊口라고 할 것만 같기도 하다. 이런 것도 '아하, 그렇구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적어도 호랑이의 입보다는 그럴 듯해 보인다.

'호구'라는 말의 어원에는 좀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원래 호랑이의 입안에 들었다는 것은 죽기 직전에 있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을 말한다. 호랑이 입이 가진 이러한 속성 때문에 바둑에서는 호구가 바둑 석 점이 이미 포위하고 있는 형국을 가리키는데, 그 속에 바둑돌을 놓으면 영락없이 먹히고 만다. 그런데도 호구 안에 돌을 디밀어 넣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 어리석음을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는 것을 '호구 잡다'라고 하고, 손해를 입는 것을 '호구 잡히다'라고 하는데, 조금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다른 어떤 말보다 더 적절한 설명이 된다.

바둑을 통한 '호구'에 대한 설명은 '호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바둑에서 호구에 돌을 두는 이유는 자신의 수만 생각하고, 자신의 수는 다 보이도록 하면서 상대의 수는 전혀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 좋은 일은 다 하고, 좋은 소리를 듣지도 못한다. 반대로 상대방의 수를 분석하고, 예측 불허의 수를 두면 호랑이의 입에 들었어도 이익을 뽑아낼 수 있다. 고려시대 때 거란족이 소손녕을 대장으로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입해 와서는 항복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 적이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파와 전쟁을 하자는 파가 갈렸지만 서희는 거란이 대군을 이끌고 와 위세만 과시하고 항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거란의 의도를 간파했다. 거란이 목표하는 것이 중원으로 진출하는 것인데, 송나라가 고려와 연합하여 거란의 배후를 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를 이용해 항복이 아닌 국교 수립만으로 전쟁을 하지 않고 거란족을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 때문에 거란과 국교를 맺기가 어렵다는 점을 내세워 압록강 유역 영토까지 얻게 된다. 이처럼 상대의 수를 분석하고 적절히 처신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상대의 의도는 모르면서 '이 수보다 나은 수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호구가 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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