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1>-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최우수상

총과 죽창, 칼을 든 공비들이 청년들은 마당으로 끌고 갔다

삽화:이태형 화가
삽화:이태형 화가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뒤로는 팔공산 능선이 병풍처럼 쳐져 있고, 남녘으론 상서로운 무학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산골치고는 제법 넉넉한 들판을 품었다. 그 마을이 내가 태어난 박사리이다. 갓바위가 거느린 골짜기에서 발원한 실개천이 모여 제법 큰 거랑을 이루었다. 소위 박사천이다. 내는 마을을 감고 돌아 금호강으로 흘러간다. 웬만한 가뭄에도 물줄기를 놓지 않고 들녘을 촉촉이 적셔준다. 1912년, 개화기에 교회를 세웠으니 일찍 문명을 받아들인 마을이다. 그러한 마을이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었다. 해마다 음력 시월이 되면 박사리는 깊은 슬픔에 휩싸인다.

박사사건은 1949년 11월 29일(음력 10월 10일) 저녁에 일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겨우 칠 개월이 지나서다. 밤하늘에 차오르는 상현달이 고샅과 초가지붕에 골고루 뿌려대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온 마을에 괴기가 감돌았다. 총과 죽창, 긴 칼을 든 검은 그림자들이 골목을 점령했다. 중요한 연설을 한다며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

청'장년들을 논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어디서 총성이 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마을 전체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공비들은 집집이 습격했다.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학살의 현장에는 놈들의 무자비한 광란의 칼춤이 바람을 갈랐다. 잔인한 칼날에 꽃다운 젊은이들의 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무고한 청'장년 38명을 죽이고, 28명에게 큰 상처를 입혔으며, 초가 108채를 불태웠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박사리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많은 유족이 생계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나갔다. 6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건의 상처도 잊혀 갔다. 나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의 아픈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유독 '그날의 사건'을 선택한 것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여겼기에. 누군가가 증언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날의 참상은 역사 속에 깊숙이 파묻혀 버릴 테니까.

막상 67년이 지난 일을 추적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묻힌 사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음에 보람을 느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망자의 유족과 중상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었다.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편지로. 직접 피해를 당하지 않았지만, 같이 마음 아파한 이웃도 만났다. 울먹이며 진술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부상자 중, 생존자의 증언을 들을 때는 그도 울고 나도 울었다. 사망자 한두 명은 후손이 끊어져 아팠던 이야기를 듣지 못해 못내 아쉽다.

글을 쓰면서 실체적 진실을 객관적 잣대로 서술하고자 노력했지만, 문득문득 목울대를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는 데 애를 먹었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충실한 내용을 쓰고자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이 미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돌아가신 분은 말이 없다. 영령들이 겪은 찰나의 심정을 어찌 글로써 엮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질곡의 삶을 살아온 유족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이것이 영령들과 부상자를 위한 책무라 여겼기에. 내가 쓴 글이 지난 역사를 반추하고 내일을 밝히는 자그마한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비명에 간 38위 영령에게 삼가 이 글을 바친다.

#작가의 시선

공비들의 작전은 치밀했다. 놈들은 학살의 현장을 크게 네 곳으로 잡았다. 그 당시 인명과 지명이다. 박명한의 집 앞 논 마당, 정원덕이 운영한 정미소 마당, 개미각단 홰나무보, 부욱 한육만의 집 근처이다. 그들은 골목 단위로 장정들을 끌어모았다. 집집이 습격했을 때,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현장에서 바로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사망 38명, 중상 28명, 초가 108채 소실! 불과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기에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사망자의 비명, 중상자의 신음, 유족의 통곡이 마을을 흔들었다. 덩달아 소'돼지'개'닭 울음소리까지. 불길에 휩싸여 우지직우지직 집 무너지는 소리, 단지 터지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뱀의 혓바닥처럼 널름거린 화마는 삽시간에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부상자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사건의 시대적 배경이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고 6'25전쟁을 전후로 사상과 이념의 대립은 혼돈의 사회를 불러왔다. 대구사건, 여순반란사건, 제주사건으로 나라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여기에 관련한 남로당과 일부 동조 세력은 토벌군에 쫓겨 산으로 도망갔다. 그들은 지리산을 총거점으로 덕유산'운문산'신불산 등 곳곳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정부군과 투쟁해 나갔다. 전쟁이 일어나면 후방을 교란하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전술이었다. 팔공산 공비들도 같은 맥락이다.

사건의 줄거리다.

팔공산에 나무하러 간 동강리 도달권이 양시골(兩城谷)에서 공비의 소굴을 발견했다.

"어디에 사느냐? 신고하면 너와 너희 마을을 박살 내 버리겠다." 공비들의 서슬 퍼런 위협에 "박사리에 삽니다"고 대답했다. 공비에게 풀려난 그는 바로 지서에 신고했다. 당국은 군경 합동작전을 펼쳐 공비 78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잔당은 동료의 원수를 갚고자 운문산 공비들과 합세하여 우리 마을을 습격했다. 소위 보복성 공격이었다. '사건이 전해지자 와촌'하양지서의 경찰과 영천 주둔군 병력이 출동하여 팔공산으로 추격전을 벌인 결과 공비 20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다.'(경산시지. 매일신문 1975. 6. 25)

증언에 따르면 생포한 한 명을 유족과 주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 유족들의 원한을 풀어주려는 당국의 배려일 성싶다. 나무꾼이 엉겁결에 둘러댄 대답으로 말미암아 박사리가 엄청난 피해를 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꾼 도달권은 왜 박사리에 산다고 대답했을까? 당사자는 세상을 떠나 말이 없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박사리는 팔공산 동녘, 갓바위 바로 아랫마을이다. 사건 이전에도 공비들이 자주 내려와 양식과 옷가지를 약탈하는 등 행패가 잦았다. 마을에서는 의협심이 강한 청년을 중심으로 그들을 경계하며 반공정신을 키워나갔다. 공비들의 동태를 신고하는 무전기를 최중환의 집에 설치해 두고 있었다. 가까운 신한리에 간이학교가 있었고, 동사에서 청소년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신문물을 일깨우고 있었다. 박사교회에서는 박용묵 목사가 주민을 계도하고 있었으니, 공비들의 눈에는 박사리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터다. 여기에 "박사리에 산다"는 나무꾼의 대답은 그들의 야만성에 불을 질렀으리라.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놈들의 작전은 주도면밀했다. 시국 강연을 한다는 것을 빌미로 습격조'학살조'보초조'방화조를 짰다. 기운이 세고 강단 있는 사람을 습격'학살조로 편성하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을 방화'보초조로 편성했을 것이다. 공비들의 학살 방법은 잔학했다. 몽둥이로 먼저 뒤통수를 치고, 뒤이어 일본도로 목을 내리쳤다. 반항하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시간에 쫓긴 공비들은 마지막엔 총을 사용했다. 총알을 최대한 아꼈을 터다. 부욱과 홰나무보에서 학살당한 청'장년 상당수는 총을 맞고 죽었다.

글을 쓰면서 자료를 수집하고자 애를 썼지만, 관련 기록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국가기록원에서도 '해당 기록이 확인 안 됨'이란 통보를 받았다. 아무리 혼돈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국가적으로 엄청스레 큰 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 보존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역사는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라 현재를 조명하는 거울인 것을.

공비들의 협박에 못 이겨 현지 주민 일부가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하고 불편한 진실 앞에 마음이 아팠다. 전국에 무장공비사건이 많았다. 그러나 박사리만큼 잔인할 수 없었다. 공비들이 각지에서 일으킨 사건은 아성공격(牙城攻擊) 형태로 주로 관공서, 공무원, 지주 계층을 지목했다. 여타 분쟁이 좌'우익 사상의 대립으로 빚어졌다면, 박사사건은 이념 다툼과는 거리가 멀다. 순수한 양민 학살사건이다. 단지 보복적 차원에서 한 마을 청'장년을 몰살하고, 마을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노림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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