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도를 통해 가치분별의 원칙을 세움
무오'갑자사화로 영남사림의 학통은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정붕은 스승인 김굉필이 죽자 단절의 위기를 맞은 영남사림의 학통을 박영에게 전수하였다. 이로써 영남사림파의 계보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붕에 이어 박영-박운-김취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도학정치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본격적으로 도학정치를 실천한 김굉필과 치인의 단계를 넘어 지치를 추진한 조광조 사이에서 가교를 담당했다. 가치분별에 확고한 원칙을 세웠으며 그의 실천 지침서는 안상도였다. 유학이 추구하는 핵심 이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조직화한 그림이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도 "학문의 정수를 알려면 마땅히 신당의 안상도(案上圖)를 보라 하였고, 또 선산은 길 선생의 절의가 있고 정신당의 도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별의 아쉬움
경상도 선산 땅 신당리에 봄볕이 여물었다. 뒷동산 골을 타고 내려오던 한 줄기 바람이 기어이 아까시나무의 꽃망울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상은 온통 꽃향기로 가득한데, 뻐꾸기는 이 산 저 산 애틋한 울음을 쏟아내었다. 아버지를 돕는 일이 즐거운 소년 붕이는 누렁이를 몰고 언덕을 올랐다. 작년까지 부리던 소가 노쇠하여 쓰임을 다하는 바람에 그의 부친은 다시 소를 들여야 했다.
모내기 철이 다가오는데 이제 겨우 송아지 티를 면한 누렁이를 보며 붕이는 마음이 바빠졌다. 풀이 무성한 들판을 찾아 소를 풀어놓았다. 열심히 풀을 뜯는 누렁이 앞에 살찐 쑥 한 줌을 내밀었다. "많이 먹고 얼른 자라서 나 대신 아버님의 힘을 덜어 주렴." 붕이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어린 소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버지 정철견은 정직하고 지조가 있으며 학식 또한 깊은 선비로 천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갔었다. 청렴한 태도와 강직한 성품은 관직 생활에 맞지 않았다. 함창현감을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시골에 머물러 있었지만, 학문을 궁구하고 덕을 기르며 스스로 수양하는 아버지를 붕이는 무척 존경하며 따랐다. 훗날 그가 청백리의 삶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붕이는 풀을 뜯는 누렁이의 위치를 확인하고서 두 팔을 베고 풀밭에 누웠다. 하룻밤만 지나면 숙부를 따라 떠나야 했다. '이제 떠나면 어머니의 따스한 눈빛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다정한 그 목소리는 또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그보다 더 걱정인 것은 천 리 먼 길에 아들을 보내놓고 노심초사할 어머니의 심정이었다.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 위로 슬픔에 겨운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심란한 마음에 무성하게 자란 풀잎 하나를 따서 입에 물었다. 붕이의 입술 사이에서 떨리는 바람 소리는 메나리조의 애절한 음률을 일으키며 봄 동산을 울렸다. 멀리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누렁이도 두고 온 어미가 그리운 것일까? 풀 뜯기를 중단하고 긴 울음을 울었다.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
정붕(1469~1512)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이며 본관은 해주(海州)다. 부친 정철견과 숙부 정석견으로부터 가학(家學)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영남사림의 학통을 계승한 도학자였다.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 사헌부지평 등 언관과 대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출처에 분명한 당위성이 없으면 출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소년 정붕은 사간원정언으로 발령받은 숙부와 함께 한양에 도착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당대 제일의 문재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영특한 그의 태도와 총명한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길재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점필재 스승님으로 이어진 학통을 계승할 제자를 얻게 되었다는 생각에 내심 기뻤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소년의 글 읽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그의 학문은 깊이를 더해갔다.
선비가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붕은 그 뜻이 조정 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고 대과에 응시할 생각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종직의 제자이며 김굉필의 오랜 교우인 남효원이 옛 친구를 찾아왔다. 그는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며 야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들의 틈에 끼어서 술잔을 받던 정붕은 단종을 기리는 남효원의 절개와 지극한 충정에 반했다.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정붕은 그의 고뇌를 함께 나누며 한동안 학문을 멀리했다. 그에게서 절의를 배울 수 있음은 좋은 일이나 자칫 도학을 멀리할까 걱정이었던 김굉필은 정붕의 숙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숙부의 간곡한 당부로 마음을 다잡았다.
◆임금에게 직언, 그리고 유배
1494년(성종 25년) 성군으로 불리던 성종이 승하했다. 그해에 세자가 보위에 오르니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이었다. 학문보다 사냥을 좋아했던 연산군은 경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정붕은 홍문관 수찬으로서 임금의 경연 참석을 독려하였다. 유생들과의 담론을 즐기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막아서는 훈구대신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어지러운 행동을 일삼는 임금을 바라보며 그의 근심은 깊어졌다. 연산군의 폭정을 예견하면서 머지않아 공자를 모신 신당의 신위판이 절간으로 옮겨질 것이라 걱정했다. 다만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사안이기에 꿈을 꾼 것으로 에둘러 말했다.
정붕의 꿈 이야기는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연산군은 성균관을 향락의 장소로 전락시키며 문묘의 공자 위패를 멀리 높은 산에 있는 암자로 옮겼다.
훈구세력은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위협을 느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이 사림파를 못마땅히 여김을 기회로 삼아 숙청을 꾀하였다. 그들의 계략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연산군의 폭정은 극으로 치달았다. 숙부인 정석견이 연회와 사냥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김종직의 문하라는 이유로 김굉필과 많은 사림파가 곤장을 맞거나 유배를 당했다. 붕당에 소속되지 않고 조의제문과 무관했던 정붕은 그나마 화를 피했다. 혼탁한 조정에서 할 일을 잃은 정붕은 탄식했다. '군주가 미흡하다 하여 의로운 선비들이 모두 떠난다면 백성들은 누가 돌보겠는가!'
그의 오랜 친구인 성희안과 술잔을 앞에 두고 조정을 바꾸어 보려 노력했다. 도학에서 점점 멀어지는 임금에게 군주의 바른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강조하며 잦은 사냥으로 인해 몰이에 나선 백성들의 노고를 헤아려주기를 두려움 없이 고했다. 그러다가 임금의 눈 밖에 난 정붕은 장형을 맞고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갑자사화로 스승을 잃다
갈잎이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정붕은 영덕의 어느 강가에 앉았다.
석양의 노을 위로 먹장구름이 몰려들었다. 또 한 차례의 피바람을 예견한 그는 긴 한숨을 토했다. 한양에 있을 때는 외롭고 쓸쓸할 때면 동향의 벗 송당 박영과 함께 나누었는데 누가 있어 이 답답한 마음을 나누겠는가?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무쳤다. 이심전심이었을까? 멀리서 송당이 바쁜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임사홍과 연산군의 장인인 신수근이 작당해 선왕대의 비밀을 폭로하며 시작된 갑자사화의 참담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연산군은 자신의 폭정과 만행을 비판하던 신진 사림들을 제거했다. 사림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스승 김굉필의 죽음은 정붕에게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학통을 계승할 문하생을 얻었다고 기뻐하시던 스승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다시는 뵙지 못한다는 슬픔에 오열했다. 등을 토닥여주는 송당의 위로에 애절한 슬픔을 가슴에 묻었다. 혼탁한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의 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 머리 위를 한 차례 기러기 떼가 둥지를 찾아 날아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정붕은 예전 직위로 복직되었다. 홍문관 교리가 되었지만, 그는 출처가 올바른 군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병을 핑계로 낙향했다. 임금이 여러 번 간곡하게 불러 마지못해 청송 부사로 나갔지만, 1512년(중종 7년) 9월 19일 그의 나이 마흔셋에 세상을 떠났다.
◆잣과 꿀의 가르침
선산의 신당리 신포서당 앞들에는 뜨거운 햇살을 자양분 삼아 벼가 꽃송이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책을 옆에 낀 아이가 김매는 아낙을 향해 논두렁길을 폴짝폴짝 뛰어갔다. 무엇이 그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붕의 잣은 높은 곳에 있고요! 정붕의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대요!'
아이는 서당에서 배운 노래를 의미도 모른 채 어머니에게 조잘조잘 전했다. 아낙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정붕의 청백리에 얽힌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청송 부사로 재직 중에 영의정으로 있던 성희안이 정붕에게 청송의 특산품인 잣과 꿀을 보내달라고 했다. 성희안은 자신을 청송 부사에 천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정붕은 반정공신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벗의 마음에 생긴 틈이 안타까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틈 하나에 둑은 무너지는 법, "잣나무는 높은 산에 있고 벌은 민가의 벌통에 있는데 태수가 어떻게 그것을 구할 것이냐"라며 가차 없이 일침을 가했다.
정신이 번쩍 든 성희안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정붕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어머니의 긴 이야기에 눈만 깜빡이고 있던 아이는 학문이 차츰차츰 깊어지면서 스스로 정붕의 정신을 알아갔다. 그 후로도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끊임없이 퍼져갔다.
정붕의 문집은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불타고 없어졌지만, 그의 정신은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면면히 살아남아 청백리의 표본으로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구미 선산읍 포상2리에 있는 신포서당에 가면 500년의 시공간을 넘어온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낭랑히 들릴 것이다. 그 앞에 서서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세를 가다듬어 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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