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6'10만세운동은 우리나라 자주독립을 일궈내는 데 큰 원동력이 된 민중만세운동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의의보다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한 운동이라는 인식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 역사학계에서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최근 학계에서 6'10만세운동의 과정과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그 가치가 다시 한 번 인정받게 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재조명됐는데 그가 바로 안동 출신 이선호(1904~?)이다. 안동 예안면 부포리 출신인 그는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동향의 권오설(1899∼1930)이 체포되면서 만세운동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서 학생들을 이끌며 권오설의 역할을 대신했다.
지난달 12일 안동민속박물관 별관에서 제90주년 6'10만세운동 기념 기획전이 열렸다. 이날 행사장에는 이선호의 둘째아들이며 유일한 후손, 이원정(81)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원정 씨는 "중앙중학교 2학년을 다닐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때 식구들과 헤어져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며 "전쟁이 끝나고 살던 서울 신당동 집을 다시 찾았는데 전쟁을 겪으며 집마저 사라졌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선호는 6'10만세운동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했다. 이후 그는 서울에서 가정을 꾸렸고 1934년 큰아들 이원성과 1935년 이원정, 1941년 이영수를 낳았다.
하지만 만세운동 주동자로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제의 감시와 억압은 계속 됐고, 식구는 극심한 생활고까지 겪었다. 광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자식 중 가장 영특한 둘째 원정을 아버지가 있는 고향 안동으로 먼저 내려보냈고 나머지 식구와 변란을 거치며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원정 씨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광복 이후 안동에 내려갔을 때 할아버지께서 보관해 온 신문기사를 보고 아버지가 한 일을 알게 됐다"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본인 때문에 혹여나 자식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게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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