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벌초 행렬이 전국의 국도를 메운다. 올해는 비교적 선선했지만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종일 풀을 베는 일은 몹시 힘들다. 게다가 예취기(풀 베는 기계)와 물, 도시락을 짊어지고 길도 없는 산을 올라가야 한다. 벌에 쏘이거나 뱀에 물리고, 예취기 날에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추석을 2, 3주 앞둔 휴일이면 수많은 한국인들이 벌초 행렬을 이룬다.
아마 한국은 세계에서 무덤이 가장 잘 조성돼 있는 나라고, 죽은 자에게 예의를 가장 잘 갖추는 나라일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한테나 잘할 것이지'라는 핀잔도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자(死者)에 대한 제사나 차례, 벌초는 사자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향을 지키는 칠순의 아재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무덤 한 기의 벌초를 마칠 때마다 상석(床石) 앞면에 깨알처럼 새겨진 한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어떤 분이고, 어떻게 살다가 가셨는지 우리에게 설명하셨다. 세월과 비바람에 쓸려 읽어내기도 힘든 글자를 매년 또박또박 짚어가며 거기 쓰인 대로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0대와 20대 시절에는 100년, 200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고, 풀을 베느라 지쳐 아재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흘리기 일쑤였다. 나이 드신 아재가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집안 어른들의 삶을 들려주신 까닭을 이해하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기원전 100년 무렵 중국 한(漢)나라 무제 때 역사가 사마천은 적에게 투항한 장수를 변호하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 48세의 나이에 궁형(宮刑'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았다. 궁형을 받은 뒤에도 그는 역사서 저술을 계속해 마침내 '사기'(史記)라는 훌륭한 역사서를 완성했다.
'사기'는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함한 통사로 정치적 사건 중심의 역사서가 아니라 제왕, 제후를 비롯해 성현과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인물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다.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모든 중국인'들을 역사 속의 인물로 만듦으로써 그들이 불초의 자손이 될 수 없도록 했다. 위정자들이 정치적 혹은 사적 행위를 할 때 눈앞의 이익과 상황을 고려함은 물론 먼 훗날의 평가까지 염두에 두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당대의 행위가 당대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먼 뒷날의 사람살이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했다. 한 개인의 탄생과 언행, 죽음이 인류 역사의 중요한 연결고리임을 알게 해 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고향 아재의 반복되는 이야기가 지루하다기보다 귀담아듣고 새겨야 할 가족사가 됐다. 내가 세상에 난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앞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성실하게 살아오신 덕분이며, 천지가 도운 결과임을 깨닫게 됐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알게 되었듯이 아재도 할아버지한테, 할아버지는 또 증조부나 고조부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웠을 것이다.
벌초에 대한 내 태도는 그 무렵부터 달라졌다. 성가신 연례행사가 아니라 내 삶을 돌아보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선대와 대화하는 시간이 됐던 것이다. 더불어 아재가 우리 항렬 형제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선산의 상석에 새겨진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할 의무가 생겼다.
벌초문화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현재의 20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가 될 즘엔 벌초문화가 없어질 것이라고 예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 세대나 당대의 과제와 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살아가는 우리는 연결자'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세상에 오기 전에 선대가 살았고,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후대가 살아갈 것이다. 까닭에 오늘 우리의 행위는 후대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당대의 우리가 충실한 연결자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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