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요산요수(樂山樂水)란 이곳 영덕을 지칭하지 않았을까? 푸른 동해, 청정한 옥계계곡,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팔각산, 복사꽃 흐드러진 오십천을 품고 있으며, 대게의 고장이기도 하다. 올 추석 연휴에 가족끼리 탐방할 만한 전통마을을 소개한다.
◇ 인량리 전통마을
5대 성씨 8종가 집성촌 이룬 '선비의 고장'
먼저 나라골 인량리 전통마을로 떠나본다. 영해에서 창수면 방향 2㎞ 거리에는 꽤 넓은 들판과 송천이 가로지르는 곳에 5대 성씨(재령 이씨, 영양 남씨, 안동 권씨, 무안 박씨, 대흥 백씨)의 8종가가 집성촌을 이루는 인량리 전통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포근하고 정겨운 나라골 보리말이라 불리기도 한다.
날개를 양쪽으로 펼쳐 놓은 것 같은 형국의 산세와 그 날개깃에 마을이 달린 듯하다고 해 나래골(翼洞)이라 불렸다. 예부터 풍속이 맑고 예절과 덕행이 올바르며, 학문이 높고 어질고 인자한 선비가 많아서 인량리(仁良里)라 불리었다.
이 마을에는 1400년대부터 1700년대 사이에 건축된 전통 고가가 20여 채나 있다. 5대 성 8종가가 거주하면서 고려시대 이후 현재까지 훌륭한 인물과 석학을 많이 배출한 명당이라 한다. 이문열 소설 '선택'에서 장씨 부인의 배경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모두 들러 보기엔 꽤 힘이 들고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중에서 삼백당, 용암종택, 오봉종택, 소호종택, 충효당은 꼭 들러볼 만하다. 요즘 이 마을에는 '꿈의 농촌한옥체험관'이란 테마로 나라골보리말 체험학교(http://blog.naver.com/ydmulkko)를 개교하여, 테마마을 방앗간, 별채, 원룸형 가족실을 갖추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예약 문의 054)733-9010.
▶어질고 인자한 선비가 많아 인량리(仁良里)라 불린다.
▶꼭 가볼만한 곳: 삼백당'충효당'용암종택'오봉종택'소호종택.
◇ 괴시리 전통마을
목은 이색을 낳은 영양 남씨의 400년 세거지
인량리 전통마을에서 영해읍 소재지 동쪽에는 영양 남씨 집성촌인 괴시리 전통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 말 대표적인 충신이자 학문과 인품이 높았던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이 태어난 외가마을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8년 이색 선생이 원나라에서 유학한 후에 귀국길에 잠시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고향인 이곳 호지촌((濠池村)이 유사하다고 하여 괴시(槐市)라고 이름지었다.
마을 앞에는 동해안의 3대 평야(영해, 평해, 흥해)인 영해평야가 드넓게 황금 들녘으로 펼쳐져 있다. 대부분의 고택이 서남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기와 토담으로 만들어진 긴 마을길은 이색적이고 정감이 간다.
이 마을이 영양 남씨(南氏) 괴시파의 400여 년 세거지가 된 것은 인조 8년(1630년)부터이다. 영양 남씨가 처음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큰 문필을 형성하여 38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씨는 시조가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이며 고려 중기에 와서 영양, 의령, 고성 남씨로 분파(分派) 되었다. 눈여겨볼 건물은 17세기 남붕익(南鵬翼)이 창건한 'ㅁ'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된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과 조선조 좌승지 남택만(南澤萬)의 손자 남유진이 건립한 물소와고택, 해촌고택 등이다. 마을 뒤편 높은 곳에는 이색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목은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이색이 중국 유학길에 들렀던 마을과 유사해 이름 지었다.
▶꼭 가볼만한 곳: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물소와고택'해촌고택'목은 기념관
◇ 신돌석 장군 유적지
일제 무찌른 '백두산 호랑이' 기개가 서린 곳
괴시리 전통마을에서 영덕 방향으로 약 15㎞ 달리면 신돌석 장군 기념관과 생가를 만날 수 있다.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는 신돌석 장군은 1878년 11월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라의 운명이 위급해져 가자 1906년 영해에서 처음으로 의병 300명을 일으켜 무력으로 일본군과 싸움에 나섰다. 이어서 울진군 평해면에서 3천 명의 의병을 재편하여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을 펼치고 경상도, 강원도 일대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적으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리고 명성도 높아졌다.
신돌석 장군을 상대하기가 힘에 겨웠던 일본군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다. 1906년 겨울 신돌석 장군은 영덕 눌곡(訥谷)으로 옛 부하이자 고종사촌인 김상열(일명 김자성)을 찾아갔다. 현상금에 눈이 먼 김상열 형제는 반가운 듯한 얼굴로 맞이한 후 독주를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도끼로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메고 일본군에게 가서 '신돌석의 머리'라며 상금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군 장교는 "사로잡아 오라고 했지 죽이라고 했느냐"며 불호령을 내리고 이들을 쫓아버렸다 한다. 어리석은 이들 형제는 사욕에 눈이 멀어 민족의 영웅인 신돌석 장군을 살해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역사의 대 죄인이 되었다.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신돌석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 충의사(忠義祠)와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 기념비, 생가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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