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이제 정말 잔칫상을 치워야 할까?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중략)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중략)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 부분)

1980년대의 어느 봄날 대학 캠퍼스, 강의실 왼편 언덕에서 여학생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재 타도! 민주주의 만세!"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돌린 우리는 높은 수조 철탑 위에서 흰 종이를 날리고 있는 그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철탑 위로 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올라가 그 여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철탑 주위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가. 강의실에 그대로 있었다. 나만이 아니고 모든 학생들이 강의실에 그대로 있었다. 늙은 교수는 수업을 중단하고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르게 울먹임이 시작되었다. 슬픔이었을까? 무력감이었을까? 울먹임은 주변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강의실은 울먹임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술도 떨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지갑을 챙기고 떠났다. 우리의 외침과 우리의 고뇌는 여전히 우리들 안에서 불타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어느 순간부터 숨을 죽이고 살았다. '너그들이 한 게 뭐가 있는데?' '우리들은 산업화를 통해 조국 근대화를 이루었잖아.' '우린 정보화 시대를 열었잖아요. 컴퓨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우리가 한 게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 시대를 살았다. 누군가는 시대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알고 있다. 누군가는 홀로 마지막까지 남아 상을 치우고 뜨거운 눈물 흘리리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 상을 차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아직은 우리가 꿈꾸었던 아름다운 시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아프다. 아직도 미완성인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의 모습은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는 1994년 출간되어 한 해 동안 50만 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 시집이다. 얼마 전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마포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며 "내가 연간소득이 1천300만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이며 재산이 적어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 신청 대상이란다"고 말했다. "공돈이 생긴다니 반갑고, 나를 차별하지 않는 세무서의 컴퓨터가 기특하다"면서도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라고 씁쓸한 심경을 고백했다. 모두 자신의 지갑을 챙기고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들의 쓸쓸한 자화상인 것 같아 가슴이 시리다. 죽 쒀서 개 준 느낌. 이제 정말 잔칫상을 치워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치운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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