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산책은 새소리와 바람소리뿐이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엿듣기에 참 좋다. 동네 할머니 여럿이 좁은 산길을 지나간다.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내 끼라고는 하나도 가진 게 없자나. 그래서 내가 이번엔 이혼할 작정을 하고, 영감한테 떼를 써서 내 이름 앞으로 머든 한 가지 해달라고 해뿟다 아이가." 한 할머니가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하며 이 말을 하자, 다른 할머니 여럿이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다. 웃음소리에 새떼들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았다.
산책길에 억새꽃이 무리지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억새꽃은 '안갖춘꽃'에 속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를 쓰는 나로서는 '안갖춘꽃'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끌렸다. 꽃은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 이상이 없는 꽃을 '안갖춘꽃'이라고 한단다. 억새는 암술과 수술은 있지만 꽃잎이 없으니 '안갖춘꽃'에 속하는 셈이다. 잠시 잠깐 산책길에 스친 할머니의 말이 '안갖춘꽃'과 연결이 되면서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다 갖추고 살면서 약한 사람을 얕잡아보는 말을 하는 '다갖춘꽃'이 있는가 하면, 산책길의 할머니처럼 자식과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며 살았을 '안갖춘꽃'도 있다.
친절한 네이버지식백과에 '안갖춘꽃'을 물어봤더니 '못갖춘꽃'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안갖춘꽃'은 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며 살았기에,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이 살았기에 '못갖춘꽃'이 맞다. 말장난 같겠지만 '안갖춘꽃'은 갖추지 않고 싶어서 안 갖춘 게 아니라, 자신은 헐벗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느라고 자신의 몫을 챙기지 못한 '못갖춘꽃'이기도 한 것이다.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를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처럼 여기며 가족을 돌보았을 '못갖춘꽃'들이 이 세상에는 억새만큼 지천이다. 그런 할머니들이 이제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할머니들의 반항이 참 예뻐 보인다.
릴케는 "가난한 사람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발뒤꿈치를 들고 지나가라"고 했다. '갖춘꽃'들에겐 벌과 나비가 끊이지 않아서 곱다는 칭찬이 자자하겠지만 '못갖춘꽃'들은 오늘도 거친 바람 앞에 마주 서 있다. '갖춘꽃'은 홀로 있어도 빛날지 모르겠지만 '못갖춘꽃' 가운데 하나인 억새는 무리 지어 있을 때 더욱 빛난다. 그래서 할머니들도 떼를 지어 산책을 가는가 보다. 가을의 새벽 햇살이 할머니들의 잿빛 머리카락 위에 부서진다. 남편과 자식 바라지하느라 재산이 얼마나 남았을까만, 산책길에서 만난 그 할머니 이름 앞으로도 등기필증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길 빌어본다.
다시 억새를 본다. 가을의 야산이나 언덕에 무리 지어 피어나는 억새의 모습은 아름답다. 안간힘을 다하며 서산을 넘어가는 노을빛을 받은 억새는 더 장관이다. '못갖춘꽃' 억새들이 까르르 웃으시며 솔 향이 번지는 좁은 산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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