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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리의 핏빛 목소리<2>-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최우수상

삽화 이태형 화가
삽화 이태형 화가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 생존자의 절규

부상자도 거의 세상을 떠나고 2016년 현재, 두 명만 남았다. 등과 목에 칼을 맞은 박영생 옹은 쌀가게를 하는 며느리를 돕고 있고, 어깨가 움푹 패고 손목을 잃은 한 분은 방에 칩거한다. 피 토하는 두 분의 목소리다. "허리를 펴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았어."

박영생 옹은 광복 후, 고산역 확장공사 때 우리 아버지와 함께 노역에 참여했다. 눈병이 나서 고생할 때 보살펴 주었다며 나를 볼 때마다 반갑게 맞아준다. 박옹의 일터인 경산 전통시장의 쌀집을 찾았다. 불편한 노구를 끌고 며느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어르신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그날의 일을 자세히 알고자 찾아왔습니다." 아들 또래인 고향 사람의 방문에 반갑게 맞으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참혹했던 그날을 회상하는 모습이다.

동생과 함께 가마니를 짜고 있었어. 하룻저녁에 두 장씩을 짜는 것이 목표였지. 두 번째 장을 짜기 위해 새끼를 가마니틀에 거는 순간, 삽짝을 밀어젖히더니 바로 방문을 왈칵 열었어. 세 사람이었어.

"누구냐?"

"너도 팔공산에 나무하러 자주 댕기제?" 총부리를 가슴팍에 대고 정미소 마당으로 끌고 갔어. 마당에는 벌써 열댓 명이 끌려 나와 무릎을 꿇고 있더군. 박태촌 어른 사랑방에서 많이 끌려 왔어. 그 사랑방은 주로 머슴과 일꾼들이 모여 노는 방이었어. 놈들은 우리를 부채꼴로 꿇어앉히더군. 몇 놈이 뒤에서 보초를 서고.

"그들이 어떻게 하던가요?"

한 사람씩 불러 세우더니 속 골목으로 끌고 가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형지물을 이용했을 것 같애. 이내, 억 억! 비명이 들렸어. 몽둥이로 머리를 치고 단칼에 목을 베는 것이 놈들의 작전이었어. 한 사람을 처치하고 또 한 사람 처치하고…. 나는 대여섯 번째 불려갔어. 몽둥이로 다짜고짜 머리를 치고, 칼로 목덜미와 등을 벴어. 그대로 쓰러졌지. 뒤이어 딴사람이 끌려오고. 놈들은 내가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야. 공비들이 물러갔을 때는 모두가 죽은 뒤였어. 그들이 철수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이 피로 칠갑되었어. 비틀거리며 태촌어른 집을 통해 집으로 향했지. 담만 넘으면 우리 집이었으니까.

태촌어른은 자기 아들은 이미 죽었다고 정신이 없더라고. 겨우 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우리 집은 불타고 있었지. 토담에 몸을 의지하여 불이 켜진 매곡어른 집에 들어갔어. 한숨을 돌려 칼을 맞은 등에 손을 댔더니 손바닥이 상처 속으로 쑤욱 들어가더라고. 칼 맞은 목과 등을 무명베 적삼을 찢어 묶은 채, 박사교회에 옮겨졌어. 교회가 오갈 데 없는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집결지였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경찰이 달려오고, 도락구로 이송됐어. 트럭에 옮겨질 때 허리와 목이 끊어지게 아프더라고. 도립병원에 입원할 때는 희붐한 새벽이었어. 넉 달 만에 퇴원했지만, 완쾌되지 않은 상태였어.

"어르신, 위로금을 받은 적은 있습니까?"

"뭐 위로금? 그런 건 전혀 없었어.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당시 박사교회에 시무한 박영묵 목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호품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가장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면요?"

"그날 밤,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를 찾아 골목길을 헤맸다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때 일을 생각하니 아직 가슴이 아려."

"어르신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겠네요?"

"말도 마래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이곳저곳을 다니며 죽을 고생을 했지. 남의 집 품팔이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었어. 여러 곳을 방랑자처럼 떠돌다가 이곳에 정착했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어. 청년 시절에 마음의 안식처였던 '박사교회'를 잊을 수 없어."

박영생 당시 18세. 2016년 현재 85세. 경산공설시장

# 외팔로 자전거를 몰며

인물이 배우 뺨칠 정도로 준수하다 해서 마을 아가씨들의 흠모 대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장이었다. 가정도 좋아 일등 신랑감이었다. 그러한 그가 놈들에 의해 팔목을 절단당했으니 마음은 오죽했을까? 누구도 그날의 상황을 쉽게 묻지 못했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서. 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집을 방문했다. 병색이 짙은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에 반가움을 가득 담고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형님,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쓰라린 참상이 역사 속에 묻혀서야 하겠습니까?"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울음을 참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날 밤은 달이 밝았어. 방천만 사랑방에 예닐곱이 놀았지. 방청백은 위채에서 자고 있었고. 어떤 친구는 새끼를 꼬고, 나머지는 짚신을 삼고 있었어. 느닷없이 사오 명이 총을 겨누며 들이닥쳤어. 나를 겨냥하더군. 내가 덩치가 가장 컸으니까.

"너거 아부지 누고?"

"배동술입니더."

"동장 아들이구나. 그동안 지서에 자주 신고했겠네." 놈들은 새끼로 팔을 뒤로 묶었어. 심상치 않아 힘을 주었지. 새끼가 지지직 끊어지더군. 놈들은 날이 선 일본도로 도망치려는 나의 목을 향해 후려쳤어. 목을 향한 첫 번째 칼날은 빗나가 어깨를 베었고, 두 번째 칼이 번쩍일 때, 엉겁결에 왼손으로 막았어. 손목이 거의 잘렸어. 순간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왔지. 쭈룩~ 피 흐르는 소리가 뚜렷이 들리더라고. 오른손으로 덜렁거리는 왼손을 싸잡고 미동어른(박두만) 집 뒷담을 타고 넘었어. 담 아래 타작한 짚북데기 속에 사람이 밟히는 거야.

"너는 누구냐?" 소리치더군. 쥐죽은 듯해야 생명을 건질 수 있었을 터인데. 조용히 하라고 말했지. 그 사람은 부촌댁 최영만 형님이었어. 그는 용케도 생명을 건졌어. 놈들이 철수하고 사랑방에 다시 갔어. 그 집은 불타지 않았으니까. 안절부절못하던 중, 대동리 사람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교회에 옮겨졌어. 아버지는 소월3동에 사는 김달봉 어른을 찾아갔지. 그 어른은 면 소재지에서 자잘한 의술을 베풀고 있었으니까."

"의료시설이 열악하지 않았나요?"

"이것저것 따질 경황이 없었지. 손목을 붙여 달라고 애원했어."

"도저히 살릴 수 없다며 손목을 잘랐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손이 잘려나가는 것을 내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더군. 지금 의술이라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거야." 뭉텅한 손목을 내보이면서 오열한다. 67년의 기나긴 세월의 강을 넘어 기억을 되살리는 그가 안쓰럽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배재기는 그러한 몸으로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다. 자전거 뒷자리에 음료수 상자를 싣고 집집이 배달했다. 구멍가게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을 꾸렸다. 한 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집에서 칩거한다.

배재기 당시 15세. 2016년 현재 82세. 경산시 하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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