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영화와 실제

"지진이 나면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조용히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거죠…."

영화 '볼케이노'(19 97)에서 지진 대피 요령을 묻는 아버지에게 13세 난 딸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물론, 딸의 조크다. 이 영화는 지진, 화산 폭발에 이은 용암 분출이라는 자연재해를 다루고 있는데, 다른 재난 영화에 비해 사실성과 몰입도가 뛰어나다. 할리우드는 재난 영화를 선호한다. 미증유의 자연재해는 관객의 긴장감과 공포를 이끌어내기에 좋은 소재다. 그렇지만 상당수 영화는 허구성이 두드러지거나 볼거리에만 치중하는,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다.

1990년대 이후 지구'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난 영화가 쏟아졌다. 토네이도의 위력을 보여주는 '트위스터'(1996), 화산 폭발을 그린 '단테스 피크'(1997), 운석 충돌을 다룬 '아마겟돈'(1998)과 '딥 임팩트'(1998) 등이 대표적이다. 지구 내부의 핵, 코어(core)를 소재로 한 '코어'(2003), 빙하기에 돌입한 지구의 모습을 그린 '투모로우'(2004) 등도 있다. 이들 재난 영화는 처음에는 단순하게 자연재해를 묘사하다가, 갈수록 자극적으로 바뀌면서 지구종말적인 경향을 보였다. '아마켓돈' '딥 임팩트' '코어'는 핵폭탄을 터트려 지구 멸망을 막는 코미디 같은 내용인데도, 영화적인 재미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최근에는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을 바탕으로 자연재해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가 많다. '2012'(2012)는 화산 폭발, 지진, 대이동, 쓰나미 등 상상가능한 자연재해가 모두 등장했다. '샌 안드레아스'(2015)는 규모 9.0의 강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쓰나미까지 덮치는, 끔찍한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국 영화 '대지진'(2010)은 23초 만에 24만 명의 사망자를 낸 1978년의 당산 대지진이 배경이다.

지난 12일 규모 5.8의 지진을 실제로 겪고 나니 재난 영화를 더는 심심풀이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지진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괴물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재난 영화의 비슷한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진 발생 및 경보 과정에서 정부 대응이 미비했다는 점은 불안감을 더해준다. 영화 '2012'에서 주인공 잭슨(존 쿠색 분)의 말이 기억난다. "정부가 안전하다고 할 때 도망쳐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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