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대통령의 사과가 드문 이유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박사(기생충학 전공)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박사(기생충학 전공)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유언을 남기셨다."

박근혜 대통령이 8'15 경축사 도중 했던 말이다.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감옥이 아닌,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 하얼빈 역이어서, 그 대목이 헷갈린 모양이다. 물론 원고 쓰는 이의 잘못이지만, 그걸 모른 채 읽은 대통령에게도 책임은 있다. 걸그룹 가수 설현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몰랐다고 공개 사과를 한 예에 비추어 보면 대통령은 훨씬 더 큰 사과를 했어야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말았다. 비단 이 일만이 아니라 대통령은 사과를 했어야 할 일에도 침묵을 지키거나 잘못한 게 없다며 우기시곤 한다.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려면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한 법이라는 점에서, 사과에 인색한 대통령을 가졌다는 건 우리 국민의 불행이다. '공개 사과의 기술'이란 책을 보니 사과라는 게 꼭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유명인들이 사과에 인색해 일을 그르치곤 했는데, 책에 의하면 사과도 그에 필요한 자질을 갖춘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 자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대방이 자신으로 인해 기분이 나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이걸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얼빈 감옥 발언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는 것은 역사에 대한 대통령의 무지가 국민들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걸 몰라서가 아닐까?

둘째, 기억력이 어느 정도 돼야 한다. 자신이 한 일을 자신이 모른다면, 사과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하는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영남권 신공항이 백지화된 일을 보자. 원래 신공항은 이명박정부에서 검토했다가 경제성이 없다고 반려한 사업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다시금 신공항을 공약함으로써 지역 주민들을 갈등으로 몰아넣었는데, 이번에도 결론은 같았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해당 주민들에게 사과해야 정상이건만, 대통령은 청와대 대변인을 시켜 "김해공항 확장이 곧 신공항"이라는 궤변을 하게 함으로써 사과를 피해갔다.

셋째, 사과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과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보다 개선된 미래를 약속하는 행위인데, 사과를 '굴복'과 동일시해 버리면 사과하기가 싫어진다. 예컨대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가 그렇다. 자신이 믿고 기용한 측근이 비리를 저지르면 해임한 뒤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사과하는 게 맞지만, 대통령은 이 사건을 "근거 없는 의혹을 통한 정권 흔들기"로 규정하며 해임을 요구하는 여론과 대결하고 있지 않은가?

넷째,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옛날 왕은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으면 자신의 덕이 부족한 탓이라고 안타까워했고, 백성들은 왕의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왕과 비교할 수야 없지만 대통령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니, 메르스 때나 세월호 참사 때 마땅히 사과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왜 내 탓이냐?"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사과는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메르스 때는 임명 하루밖에 안 된 총리가 사과했고, 세월호 때는 그래도 대통령이 사과했지만, 싫은데 억지로 끌려나와 했다는 게 너무 티가 났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사과를 해서 좋았던 경험이 없으면 사과를 잘 안 하게 된다. 그러니 대통령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평소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감동이다" "이런 일이 내 생애에 일어나다니" 같은 말로 격려해줘야 마땅하다. 아쉽게도 우리에겐 이런 면이 부족했다. 물론 단 한 번도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은, 그래서 우리가 격려할 기회를 주지 않은 대통령에게 더 큰 잘못이 있지만 말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