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않으면 어찌 군자라 하랴
고향으로 내려온 박영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멈춘 듯 흐르는 저 유유한 강물의 근원은 어디일까? 저들은 높은 산중에 빗물로 내려 골골을 헤집어 왔으리라. 때로는 거침없이 자신을 내던지며 천 길 폭포를 두려움 없이 뛰어내렸을 테지. 수많은 여울을 돌아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해 내달려 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여유로울 수가 있을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시련을 피해 도망치듯 내려온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마검술(馬劍術)은 한낱 용부(勇夫)가 할 일이라, 사람으로서 학문을 않으면 어찌 군자라 하랴.' 그는 한탄만 해왔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박영은 못다 했던 글공부를 결심했다. 낙동강변에 송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스승 정붕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다
어느 날, 미봉사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던 박영에게 정붕이 찾아왔다. 한양에서 인연을 맺은 그의 존재는 양친을 일찍 여의어 외로움을 많이 타던 박영에게 때로는 자상한 형이었으며 고향이었고 사무치게 그리운 부모였다. 고향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기가 한량없었다. 강변을 거닐며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었다. 박영이 독서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정붕은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인(武人)인데 독서를 해서 무엇하겠는가?"
"지난날 잘못된 길을 걸은 것이 후회되어 독서를 통해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알고자 해서이옵니다."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이냐고 정붕이 물었고, 방영은 '대학'이라고 대답하였다. 굽이치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정붕과 박영은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정수리를 넘는 햇살이 강물 위로 내려 물비늘이 되어 번뜩였다. 강 건너 우뚝 솟은 청화산과 가람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를 품은 냉산이 서로 어깨를 기대어 다정하였다. 정붕은 냉산을 가리키며 느닷없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자네 저 우뚝 솟은 산 너머에는 뭐가 있다고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보게나 자실, 흘러가는 저 강물을 한 번 보게나!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르지 아니한가!"
"네 스승님, 저 강물처럼 부단히 노력하라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게지요?"
"허허 이 사람, 안 보던 사이에 눈치가 많이 늘었네. 물은 네모에 담으면 네모로, 세모에 담으면 세모로 존재하지. 직선으로 흐르다가 때로는 곡선을 그리며 흐르기도 하지 않던가? 어떤 순간에 정체하기도 하지만, 모양이나 형태와 깊이와 상관없이 결국에는 흘러간다네."
제자를 걱정하는 스승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웠다.
"물의 이치를 잘 깨달아 부단히 노력하라는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자신의 학문이 얕음을 절실히 느낀 박영은 더욱 정진하여 일취월장했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정붕은 송당의 늦공부가 걱정되어 다시 그를 찾았다.
"스승님, 또 저 산 밖이 궁금하시어 오셨습니까?"
"하하하 이제 그만큼 공부를 했으니 짐작이 있을 터인데?"
"스승님, 저 산 밖에는 다시 산이 있을 겁니다."
그의 대답은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유가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었다. 박영의 학문은 곧 인간의 삶이 허상보다 실재에 있다는 생각을 나타내며 이것은 송당학파라는 영남사림의 특출한 맥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옳거니! 그대의 학문이 참으로 깊네 그려!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군."
정붕은 박영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박영은 여덟 살 위의 정붕을 깍듯이 스승으로 모시어 도의 실천을 강조하며 진지한 학문을 나누었다.
◆의학을 익혀 지선명덕을 실천
박영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소용돌이에서도 오직 학업에만 열중했다. 갑자사화는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해 중종반정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중종 임금은 1509년에 박영을 선전관에 임명했다.
명분을 중시했던 그는 벼슬을 사양했다. 대학의 '지선명덕'을 강조하며 몸소 실천하려 했던 박영은 가난하여 치료받지 못하는 백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어가는 아비를 약 한 첩 못써 보고 보내야 했던 자식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의학을 공부해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기 시작했다. 이듬해 삼포에 왜구가 침입하자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명분으로 조방장이 되어 왜란을 평정하였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장에서의 피폐한 마음으로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박영은 시 한 수를 읊으며 마음을 달랬다.
'외진 남쪽 변방 바다 기운 침침한데 / 투구 쓰고 갑옷 입은 왕손 늙어가네.
기린각에 이름 오르는 것 마음에 없어 / 낙동강 강 마을에 집이 있도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은 그는 아픈 백성이 눈에 아른거렸다. 벼슬을 내려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승 정붕의 죽음
1512년(중종 7년) 어느 날, 강 건넛마을에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던 아낙에게 말린 짚신나물을 가져다주고 돌아와 보니 청송 부사로 있던 정붕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와 있었다. 의학을 공부하고도 스승의 중병을 보살피지 못함을 자책했다. 김굉필의 학통을 이어받아 자신에게 전수해 주었으며 대학의 진수를 깨우쳐 준 스승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지난날이 아득한 그리움으로 밀려왔다.
정붕은 청렴하고 꼿꼿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새해 첫날을 보내고 박영은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동향인 정붕의 집을 찾았다. 대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울상이 되어 급하게 나가는 여종과 마주쳤다. 팔에는 삼노끈이 단단히 묶여 있어 그 모습이 괴이하였다. 정붕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유자광과 정붕은 외족이었다.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정국공신 무령군으로 봉해진 그의 탐욕이 밉기는 했지만, 왕래를 끊을 도리는 없었다. 직접 찾아가는 일은 없었고 다만, 심부름하는 종을 사이에 두고 문안을 주고받았다.
심부름을 보낸 여종이 무령군의 종들과 어울리다가 집안의 어려운 문제를 떠벌릴 것을 염려했다. 정붕의 곤궁함을 알기라도 하면 무령군이 쌀과 돈을 보내올 것이니 거부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무령군과 연관 지으려 할 것이기에 동여맨 팔뚝이 아파서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려는 방법이었다.
청백리의 삶을 철저하게 실천하던 스승님의 모습이 생생한데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청송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스승님의 심성을 닮은 것일까? 내내 따라오는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이 시렸다.
◆관직에 나갈 때는 명분을 중요시 여김
박영은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관료의 부패를 바로잡았으며 의술로 백성들을 돌보았고 세금을 절반으로 줄였다.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명분이 없는 벼슬을 절대 응하지 않았던 박영은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으며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 자리에 올랐다가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중종은 연산군에 의해 희생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했다. 한훤당 김굉필의 유배지로 찾아가 제자가 된 조광조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광조에 의해 더 많은 신진세력이 늘어나자 훈구파와 신진사류 사이 갈등이 심해졌다.
이후 조광조의 공훈삭제로 인해 공신의 수가 줄어들자 훈구파는 조광조를 없앨 계획을 세운다. 홍경주의 딸 희빈이 중종의 후궁임을 이용해 조광조를 모함했다. 그로 인해 중종이 조광조를 죽이게 되고 이로써 신진사류들이 숙청되었다. 그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박영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했다.
이듬해 김해부사가 되었다. 김억제의 모함으로 유인숙과 함께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풀려날 수 있었다.
◆도학자로서 실천적 삶
고향으로 돌아와 강학 활동과 도학자로서의 실천적 삶이 시작되었다. 16년 동안 지역 주민을 의술로 돌보았으며 밤에는 학문에 전념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1519년(종종 14년) 진사시를 위해 상경한 용암 박운이 처음 박영을 만나보고 마음속으로 깊이 감복했다.
시골로 돌아가 진락당 김취성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자고 하였다. 그로 인해 송당학파로 불린 박영 문하에서 박운, 김취성, 김취문 형제와 최응룡과 같은 선산 출신의 걸출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남쪽 해안에는 왜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문무를 겸비한 박영의 탁월한 역량을 높이 산 중종은 그를 영남좌절도사로 임명해 왜구를 응징하도록 했다. 부임 이후 해안지방을 철통같이 경계하였으며 각 고을을 수시로 순방하며 백성들을 살피던 중, 1540년(중종 35년) 향년 70세로 돌보아야 할 많은 백성을 남겨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혈기왕성하던 20대의 실수를 평생의 본보기로 삼았던 찢어진 의복이 묵묵히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의 위패는 선산 일대에 명현을 제향한 금오서원에 길재, 김종직, 정붕, 장현광과 함께 배향되었다. 초야에 묻혀 사는 동안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중 송당집(宋堂集), 경험방(經驗方), 활인신방(活人新方),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등이 후손들에 의해 전해온다.
1568년(선조 원년) 당시 사림파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은 "지금 모두들 도학하면 조광조를 추존할 뿐이고 박영'정붕에 대해서는 세상에 아는 이가 없다"고 당시 사림파의 편향된 분위기를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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