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새論새評] 핵핵(核核)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보수정권 "북한과 대화 끝났다" 공언

'동북아 균형자' 北-美 중재역 포기해

미국, 核문제 대화국면으로 전환 땐

정부 스스로 '통미봉남' 자충수 둔 셈

생각해 보라. 북한은 우리와 대화를 할 때도 핵실험을 했고, 대결을 할 때도 핵실험을 했다. 이는 북한의 핵실험에서 우리의 대응은 큰 변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북핵 사태에서 우리는 그저 조연일 뿐, 주연은 결국 미국과 북한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해결의 열쇠를 가진 이 두 주체가 상대를 서로 극단적으로 불신한다는 데에 있다.

그동안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를 고수해 왔다. 그럼에도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북한과 대화를 해봤자 그들에게 핵실험을 위한 시간만 벌어줄 뿐이라는 논리를 무색하게 한다. 대화가 끊긴 틈을 이용하여 북한은 외려 핵 프로그램을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하긴, 대화가 끊어진 게 막 나가는 데 차라리 편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주연은 아닐지라도, 이 문제에서 우리가 비중 있는 조연이 될 여지는 있다. 바로 북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시한 '동북아 균형자론'이다. 하지만 보수정권은 금강산 관광'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남북대화마저 포기해 버렸다. 그러니 이런 사태가 벌어져도 딱히 할 역할이 없는 것이다.

특히 사드 배치 결정은 최악의 수였다. 사드는 한미일 동맹의 강화를 의미한다. 문제는 이 동맹이 북한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까지 '가상적'으로 상정한다는 데 있다. 사드로 그나마 그동안 북미 관계를 조율하던 두 나라의 등마저 돌려놓았으니, 이제 두 나라를 중재할 주체까지 사라져 버린 셈이다. 그러니 둘이 강대강의 극한대결로 치달을 수밖에.

미국에서는 한반도 상공에 B-1B 폭격기를 날린다. 이에 맞서 북에서는 신형 위성 로켓엔진 실험을 한다. 이 분위기에 한껏 들떠 정부는 "평양의 일부 지역을 지도에서 아예 지워버리겠다"고 공언한다. 그 어느 때보다 군사적으로 긴장이 고조된 상황인데, 그새 다들 만성이 됐는지 이제는 초음속 폭격기에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I) 로켓엔진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전략적 인내가 효과가 있다면 모를까, 앞으로 몇 년 만 더 인내했다간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ICBM 능력을 갖출 판이다. 그나마 희미한 희망이 남아 있다면 북한도 아직 입으로는 미국과의 대화를 원하고, 미국에서도 전략적 인내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나 북미가 대화 국면으로 넘어가면 그때 우리 처지는 매우 한심해진다. 정부 스스로 "북한과의 대화는 끝났다"고 말해 왔으니 그 대화에 우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 협상의 결과로 북한에 제공할 반대급부도 과거처럼 고스란히 우리가 덤터기 쓸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 스스로 '통미봉남'의 자충수를 둔 셈이다.

우리가 이렇게 한심한 신세가 된 것은 한미동맹의 하위 파트너로서 전시작전권은 물론이고, 한미일 동맹의 최하위 파트너로서 평시외교권마저 스스로 포기한 결과다. 이 땅에서 한미동맹은 거의 중세의 신학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한미관계도 우리의 국익과 우리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보자고 주장하면, 졸지에 이단으로 몰린다.

보수논객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하자는 주장을 '사대주의'라 비난한다. 지금의 중국이 조선시대의 명나라라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오늘날 명나라는 미국이고, 청나라는 중국이다. 명청교체기에는 섬세한 균형외교가 필요하다. 사대주의자는 외려 미국을 조선시대에 명나라 섬기듯 섬기는 그분들로 보인다.

10년 동안 전략적 인내로도, 두 정권에 걸친 대화의 단절로도 북핵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애초에 해법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럼 이제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기에 우리가 북미의 중재자, 미중의 완충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나마 비중 있는 조역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정책은 실패하고 대책은 없다. 그러니 고작 외치는 소리가 '핵 들여오자' '핵 개발하자' 안쓰럽다. 아무리 '핵핵'(核核)거려야 내 귀엔 못난 놈이 자위하며 내지르는 허무한 신음소리로 들릴 뿐이다.